지난 반세기 가까이 ‘우향우’ 행진을 계속해온 연방대법원의 보수화 시대가 예상보다 빨리 저물어가는 신호를 보이고 있다.
작년 10월 초, 대법원의 2015~2016년 새 회기가 시작될 무렵만 해도 보수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법조계의 전망도 그랬고, 전 회기의 동성결혼 및 오바마케어 합헌 판결로 전국에 메아리 친 진보의 환호를 감수해야 했던 보수진영의 희망도 최고조에 달했다 : 오래 끌어온 어퍼머티브 액션을 무효화시키고, 엄격한 낙태규제를 합헌판결로 정착시킬 것이며 노조의 파워를 약화시키고…
전망은 빗나갔고 희망은 좌절되었다. 27일로 마친 이번 회기도 진보의 승리가 확실하다. 그 파장도 상당히 크다. 단순히 한 두건의 판결 혹은 한 회기의 승패를 넘어 대법원 보수시대 폐막의 신호, 대법관 세대교체의 전조라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릿 저널을 비롯한 진보 및 보수 주요 언론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변수를 지적한다. 보수의 거두 앤터닌 스칼리아 대법관의 죽음과 중도보수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의 진보화다.
“2월13일 스칼리아가 텍사스 여행 중 사망한 날 밤에 모든 게 바뀌었다”는 CNN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스칼리아의 죽음과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후임자에 대한 상원 공화당의 인준절차 거부로 대법관이 9명 홀수에서 8명 짝수로 줄어든 법정에선 공무원 노조와 이민행정명령 등 주요 케이스 판결이 4대4 동수로 양분되는 교착상태가 빚어졌다.
캘리포니아 교사노조의 비회원 회비징수 케이스는 스칼리아 사망 한 달 전 1월 심의 때 이미 ‘위헌’ 결정 분위기가 완연해 사무엘 얼리토 대법관에게 판결문 작성까지 맡겨졌을 정도였는데 동수 결정이 나는 바람에 노조의 손을 들어준 항소심 판결이 유지되었다. 보수의 패배다.
반대로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행정명령 위헌소송에 대한 4대4 동수결정은 진보의 패배와 함께 500만 서류미비 이민자의 삶을 다시 불안한 그늘 속으로 몰아넣었다.
스칼리아가 죽지 않았더라면 둘 다 보수가 승리를 거둘 케이스였고, 후임으로 지명된 메릭 갈랜드 판사가 인준되었더라면 두 케이스 모두 진보의 승리로 판가름 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칼리아 죽음으로 대법원이 기능마비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금년 역시 대법원은 중요한 역사적 한 걸음을 내딛었고 그 이정표적 판결은 케네디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번 회기에도 대법원은 여전히 ‘앤소니 케네디의 법정’이었다. 그가 4명의 진보파 대법관들에 합류하면 진보 승리의 판결이 내려졌고 3명의 보수파 쪽에 서면 4대4 교착상태가 빚어졌다. 그리고 미 사회의 가장 분열적 핫이슈를 다룬 케이스에서 그는 보수의 오랜 열망과는 정반대로 진보적 판결을 주도했다. 벼랑 끝에 선 어퍼머티브 액션과 낙태권리를 구해낸 것이다.
회기 마지막 날인 27일 낙태 클리닉에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를 가해온 텍사스 주법에 대한 위헌 판결은 낙태권 보호운동의 중대한 승리로 평가된다. 낙태클리닉에 외과병원 수준의 시설과 인력을 요구, 클리닉 운영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 텍사스의 사실상 ‘낙태 클리닉 폐쇄법’에 대해 “여성건강에는 별 혜택도 없이 ‘과도한 부담’을 주고 있다”면서 5대3 판결로 무효화시킨 것이다. 지난 20여년 넘게 크고 작은 낙태규제 시행을 상당수 허용해온 대법원이 “이제 그만 하라, 너무 갔다”라고 선언한 것이라고 USA투데이는 풀이했다.
지난주 케네디는 대학 입학전형의 소수인종 우대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의 종식이 예상되었던 텍사스대학 소송에서 진보파에 합류해 합헌 판결을 이끌어냈다.
평소 인종우대 정책에 대한 회의를 숨기지 않고 과거 낙태규제법 케이스에서 지지표를 던져온 케네디의 시각을 감안한다면 진보진영에서도 기대 못했던 깜짝 판결이었다. 동료 보수파와 결별하고 노선을 달리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지켜온 자신의 입장도 바꾼 것이다.
케네디를 ‘5번째 진보파 대법관’에 비유할 만큼 케네디의 예상외 좌클릭은 그의 비중을 다시 한 번 부각시켰으나 ‘케네디의 법정’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내셔널 저널은 분석한다. 새로운 진보파 대법관의 입성을 점치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차기 대통령 당선을 전제로 한 진보진영의 희망사항이다.
힐러리 77%, 도널드 트럼프 19%로 집계된 CNN 대선 예측사이트의 승률을 보면 대법원 보수시대의 저물녘은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어윈 케머런스키 UC데이비스 법대교수에 의하면 1960년 이후 대법관들의 은퇴연령은 평균 79세라고 한다. 스칼리아 후임 외에도 차기 대통령 임기 중 3명의 대법관을 더 지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평생직인 대법관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깊숙이 우리 일상에 들어 와 있다. 대법원의 판결은 대통령이나 의회의 어떤 결정보다 더 지속적으로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좌우한다. 그 대법원이 지금 변화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향후 수십년 진보와 보수 중 어떤 이념지형을 갖게 될 것인가 - 금년 대선은 우리가 대법원의 운명을 결정해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
박 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