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교장 한 명으로부터 은퇴와 이직에 관한 인사를 받았다. 평소에 시간강사로 가르치던 대학에서 풀타임 부교수 자리 제의가 왔다고 했다. 이제 거의 30년간 몸 담았던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와 17년 동안의 교장직을 떠날 때가 된 모양이라고 했다. 그를 축하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 교장의 어렸을 때 경험담을 듣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자랐는데 자신은 10살 때 처음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필요한 것은 자신이 일해서 번 돈으로 해결했다. 집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의사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
처음에 했던 일은 여름방학 두 달 동안 했던 낚시용 지렁이 채집이었다. 하루에 3시간 정도에 불과했지만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고된 작업이었다. 밴에 7-8명이 타고 가다 작업장인 공터에 내리면 머리에는 광부처럼 전등을, 그리고 한 쪽 다리춤에는 깡통을 매고 지렁이를 찾아 담았다. 3시간이면 깡통으로 두 개 정도 채울 수 있었는데 한 통에 10달러씩을 받았다. 지렁이 잡는 일 다음에는 신문배달을 했다. 그 일도 새벽 5시부터 시작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좋아서 했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들을 들으며 내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일했던 경험들이 생각났다. 1974년에 이민 온 지 얼마 안되어 모친이 갑자기 알렉산드리아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 영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의사, 간호사와 소통이 어려웠다. 통역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많지 않았고, 그 병원에 한국어 통역 담당자가 없었다. 그 때 그 병원의 부원장이라고 하는 분이 병실로 찾아 왔다. 중년 여성이었는데 한인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아주 어려서 온 듯했다. 한국어 구사가 서툴렀다. “한 시(時) 반”을 “한 점(點) 반”이라고 하는 등 나에게는 어색한 옛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 집 가정 사정이 딱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혹시 일을 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주말에 이틀간 하루에 8시간씩 청소하는 일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에 온 지 일년이 채 안된 고등학생 시절에 갑자기 병원 파트타임 청소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런 일을 해 본 경험이 없는 나는 복도를 윤기나게 닦는 청소기를 제대로 조종하지 못해 처음에는 여기저기에 그냥 갖다 부딪치곤 했다. 응급실 바닥의 피를 닦는 것은 금방 익숙해졌지만, 인적도 드문 병원 뒷 쪽의 시체실 앞 복도를 청소할 때는 항상 뒷머리가 일어서는 느낌을 받았다. 12학년 때는 동네 잡화가게에서 캐쉬어로도 일했다. 세 살 아래의 여동생은 주말에 도너츠 가게에서 밤새워 도너츠를 구워내는 일을 했다.
나에게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파트타임이라도 일하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대견해 보인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 허드렛일이나 단순 노동이라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경험해 보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실 내가 약 10년 정도 나의 모교에 입학지원을 한 학생들을 인터뷰 평가 하면서 그런 학생들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을 느꼈다. 여름방학마다 공부만 하거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여행이나 캠프에 가는 학생들 보다 집안 형편에 상관없이 힘든 일도 해 보는 경험을 쌓은 학생들에게는 좋은 평점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비해 요즈음의 학생들은 어쩌면 너무 곱게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부모들이 쳐 놓은 단단하고 커다란 보호막 안에서 말이다. 부모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챙겨 주고 힘든 것으로부터 자녀들을 방어해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더욱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지 우려된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데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너무 가슴 안에만 품지 말고 좀 터프하게도 키워 보았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한 여름방학은 꼭 일을 해 보도록 권해 보기 바란다.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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