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으로 유학 왔던 1966년, 돌이켜 보면 이 또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다. 그때 내가 한국서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돈은 100달러라는 거금이었다. 그나마도 그전 까지는 50달러이던 것이 그 해에 껑충 뛰어 배로 늘었으므로 “와, 한 해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다니….” 하며 20달러짜리 다섯 장을 지갑 깊숙이 넣고 틈틈이 그들이 아직 지갑 속에 건재해 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하며 미국에 왔다.
오랫동안 남존여비 사상, 가부장적인 세월을 누려왔던 한국 남자 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지만, 여자에게 문도 열어주고, 차도 먼저 태워주고, 앉을 자리 살펴 의자를 끌어주는 코쟁이 신사(?)들을 보고 “아, 미국에 오길 잘했네. 여기는 여자를 엄청 위하는 나라구나” 하며 혀를 내둘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모자라는지 “남녀동등”을 외치며 시위하는 여자들을 보면 고개를 갸웃 했었다. “아니, 그만하면 된 것 아냐? 더 원해? 저러다 벌 받지!” 하면서.
지난주 미 재무성은 20불짜리에 있는 앤드루 잭슨을 2020년부터는 뒤로 보내고 앞면에 해리엣 터브먼을 넣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현금을 두둑하니 지니고 다녀야 배도 부른 듯 싶었던 한국과는 달리 미국인들은 현찰을 많이 갖고 다니지 않는다. 특히 크레딧 카드를 쓰기 시작한 후로는 더 그렇다. 수년 내 현찰은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사람조차 있다. 일 불짜리 지폐나 동전은 지갑을 두껍고 무겁게 하는 불편이 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20불짜리 한두 장만 갖고 다니는 것이다. 남의 지갑이 어쩐지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다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 보면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지폐는 20달러짜리 아닐런지. 그 자리에 해리엣 터브먼이 들어간다. 그것도 해리엣 같은 노예를 150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던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을 밀어내고 말이다.
솔직히 터브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지하조직을 만들어 흑인 노예를 캐나다로 도망시킨 여성” 정도가 다였다. 이런 마당에, 이왕 미국에 사는데, 그 여자에 대한 상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찾아봤다.
노예 부모 밑에서 1820년경 태어난 노예해방 운동가, 인권주의자이며, 남북전쟁시에는 북군의 스파이였다, 등등이 그녀의 직함이다. 흑인 노예 부모를 둔 해리엣은 매릴랜드주 도체스터 카운티의 농장에서 아홉 자녀 중 여섯째다. 언니 셋은 일찌감치 팔려 갔고 아직 어린 막내동생 모세를 사겠다는 사람이 왔을 때 해리엣의 (그때는 이름은 해리엣이 아니고 민티였음) 어머니가 “누구든 내 아들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골통을 부셔버리겠다”며 무섭게 덤벼들자 아무도 모세를 뺏어가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때 어렸던 해리엣은 ‘반항의 힘’을 배웠으리라고 한다. 해리엣이 다섯, 여섯 살 때 주인집 아기를 돌봤는데 아기가 울면 매를 심하게 맞아 그때 맞은 매 자국을 평생 가지고 살았다. 한번은 다른 노예한테 던진 쇳덩이에 머리를 맞아 기절했는데 그로 인해 심한 두통, 환각, 환청, 경기로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남북전쟁 전에는 노예 친척, 친지들을 몰래 구출해 노예제가 없는 북이나 캐나다로 보내는 일을 숨어서 하다가 남북전쟁이 터지자 아예 전선으로 뛰어들어 총 들고 북군 위해 싸웠다.
독자는 1달러짜리 동전에 나오는 수잔 비 앤토니를 기억하리라. 해리엣과 수잔 비 앤토니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생년월일이 확실한 수잔(1820년 2월 20일- 1906년 3월 13일)과는 달리 흑인 노예로 태어난 해리엣의 생년월일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학자들은 1822년 정도로 추정한다. 죽은 날짜는 1913년 3월 10일. (참고로 우리나라는 조선 말 격동기였던 23대 순조 때부터 27대 고종 때이다.) 해리엣이 1822년 생이라면 남북전쟁은 39세에서 43세 사이다. 전쟁 후로는 흑인, 노인들의 삶과 지위 향상을 위해, 또 여자들의 참정권을 위해 수잔 비 앤토니 같은 여자들과 함께 일했다.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던 해리엣은 1890년대 말 의사에게 부탁해 마취도 없이 남북전쟁 때 팔다리 잘라내는 수술 받던 군인들처럼 입에 총알을 악물고 뇌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수술 후 “의사가 내 골통을 톱으로 자르고 제 자리에 잡아준 후로는 훨씬 낫다”고 했다니 어느 대장부 못지않다. 대통령 밀쳐내고 그 자리 차지할만한 인물(?) 아닌가!
<김성혜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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