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북동부 5개주 경선을 휩쓸며 압승을 거둔 것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이지만 ‘사실상 대선후보’에 먼저 안착한 것은 4개주에서 승리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이날 경선의 최대 패자는 양당 통틀어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라는 의미다.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5개주 중 로드아일랜드에선 승리했고 코네티컷에서도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 상당히 선전했다. 그러나 종반에 들어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의원 계산이다. 언더독의 기대 이상 ‘선전’이 판세를 바꾸는 모멘텀이 될 수 있는 시점이 지나버린 것이다.
이날 밤 힐러리의 승리 연설은 이미 본선을 향해 있었다. 대세를 확인한 힐러리에겐 샌더스도 더 이상 공격의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정치에서 “무책임한 돈의 파워를 퇴출시키려는 (샌더스의) 도전”에 오히려 찬사를 보냈고 “우리는 꿈을 꾸며 동시에 행동도 할 수 있다”면서 샌더스 지지자들을 향해 단합을 위한 화해의 올리브가지를 내밀었다.
샌더스는 아직 경선을 끝낼 태세가 아니다. 민주당 경선이 사실상 끝났다는 뉴스가 계속되던 26일 밤에도 차후 경선지인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앞으로의 승리를 다짐하는 열변을 토해냈다. 그는 “마지막 한 표가 행사될 때까지” 경선을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했고 그의 진영은 클린턴 부부가 트럼프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진을 담은 모금용 이메일을 발송하는 등 경선 완주의 의지를 과시했다.
속사정은 다를 것이다. 지명전 승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샌더스 자신이 모를 리 없다. 26일 하루에만 “언제 하차할 것이냐”는 미디어의 질문을 50여 차례나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 계산해도 대의원 계산엔 빨간불이 켜지니 당연한 질문이다. 다음 주 인디애나와 그 다음 주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리한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되고, 샌더스 진영이 “무지개 끝에 있는 황금 단지”처럼 희망을 걸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의 압승조차도(현재 힐러리의 지지도가 더 높다!) 판세 반전을 약속해주지 못한다.
27일엔 캠페인 인력 수백명 감축계획도 밝혔다. 그전날 밤 발표한 성명에선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평소의 주장이 사라졌다. 그보다는 경선 완주로 가능한 많은 대의원을 확보해 전당대회에서 더욱 진보적인 정강채택을 위해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힐러리 승리를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샌더스는 표 없고 돈 떨어져 포기해야하는 여느 패자가 아니다. 경선에서 실제로 승리하기엔 너무 약했지만 패배를 시인하며 당장 하차하기엔 너무 강력하다. 싸움에선 졌어도 경선의 끝까지 갈 수 있는 힘과 가야할 명분이 여전히 넉넉하다.
경선의 완주를 천명하는 이유를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지가 정리했다 :
우선 모금실적이 벌써 석 달째 힐러리를 능가한다. 끊이지 않는 소액기부로 3월에만 4,400만 달러를 모금했다.
가는 곳마다 모여드는 구름청중도 샌더스의 막강한 배경이다. 수천수만명의 환호가 쏟아지는 연단에 선 샌더스의 흥분을 누가 과소평가할 수 있겠는가.
샌더스는 민주당이 아닌 무소속이다. 당을 위해 당장 하차하라는 압력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에게 ‘당’은 투쟁의 대상인 기득권층이다.
“만약에…”도 생각해야 한다. 만일 힐러리가 이메일 문제로 기소된다면, 만일 클린턴재단의 재정문제가 파문을 몰고 온다면, 그래서 힐러리가 퇴장해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면 샌더스는 민주당의 유일한 주자가 된다.
그리고, 힐러리도 그랬었다! 2008년 오바마와 격전을 벌여온 힐러리가 결국 하차를 선언한 것은 마지막 경선이 끝난 6월이 되어서였다. 패배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힐러리는 공개 하차 압박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힐러리 진영과 만주당 지도부는 인신공격 아닌, 이슈 중심의 건전한 캠페인을 조심조심 권유하고 있는 정도다.
어느 면에서 샌더스는 이미 승리를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불평등 해소 등 진보이슈를 평생과제로 삼아 온 ‘민주적 사회주의자’ 샌더스에게 2016년 대선은 꿈의 실현이었다. 전국무대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74세 백발의 버몬트 주 연방 상원의원은 불과 1년 만에 보통사람들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하나의 캠페인이 아닌 ‘정치혁명’을 기치로 삼은 샌더스는 민주당 정부에 대한 민주당 표밭의 불안과 불만에 다가가 그들을 대변하며 힐러리와 민주당의 변화를 촉구했다. 정치를 외면해온 젊은 표밭을 잠에서 깨워낸 샌더스 돌풍은 중도파 힐러리에게서 무역과 최저임금, 환경문제 등에서 좌클릭 공약을 끌어냈으며 이제 전당대회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통해 민주당의 미래를 바꾸려 하고 있다.
힘 있는 패자로 ‘플랜 B’의 남은 여정을 시작하는 그에겐 최소한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전당대회에서 힐러리와 손잡을 수도 있고 급진 리버럴의 기수로 계속 싸울 수도 있다. 후자를 택할 수도 있지만 샌더스가 ‘도덕적 승리’를 선언한 후 자신의 지지층에게 (열정적 까지는 아니어도) 힐러리 지지를 호소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현재로선 유력하다. 두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화합할까”는 승패가 판가름 나버린 민주당 경선에서 그나마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불평등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게 했던 샌더스의 마지막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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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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