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전 갑작스럽게 타계한 앤터닌 스칼리아 대법관 빈자리의 의미가 이제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의 판결들이 한 대법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왜 공화당이 후임 인준을 그처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는지, 공백의 장기화가 대법원 뿐 아니라 보통사람의 일상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9일 연방대법원은 캘리포니아 교사노조의 비회원에 대한 회비 강제징수 관련 소송 심의결과, 4대 4로 교착상태에 빠진 채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동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이 법 해석의 결론을 내려주지 못했으므로 회비 징수를 합헌으로 인정한 항소심의 판결이 유지된다. 노조의 승리다.
지난주에도 나왔던 동수 판결은 덜 논쟁적인 은행과 고객 간의 파산소송이어서 별로 조명 받지는 못했으나 결과는 더 난감했다. 두 곳 항소법원에서 반대되는 판결이 내려진 케이스로 대법원이 그 이견을 조정해 주지 않았으므로 관련된 ‘평등신용기회법’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게 되었다.
대법관들의 이념성향에 따라 5대 4로 보수 우위였던 대법원 구도가 보수 스칼리아의 죽음과 함께 4대 4로 맞서게 되었으니 앞으로도 동수 판결은 계속될 것이다. 전체 심의 케이스의 약 4분의 1정도이지만 논쟁 심한 주요 이슈가 대부분이어서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이번엔 진보가 승리했으나 종교의 자유가 엮인 피임약처방 오바마케어 소송에서 낙태제한법, 투표권법, 어퍼머티브 액션 등까지 무승부가 예상되는 케이스는 앞으로도 상당수가 남아 있다. 특히 수백만 서류미비 이민자들의 추방유예가 달려있는 오바마의 이민행정명령 판결은 전망이 어둡다. 하급심에서 잠정 집행중단 결정을 받은 바 있어 동수 판결이 내려진다면 수백만 이민자의 삶이 기약도 없이 불안에 빠질 수 있다.
국민의 일상을 좌우하는 법적 논쟁의 최후 중재자인 연방대법원이 한 발이 묶인 채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노조의 승리도 현상유지를 의미할 뿐 장기간 영향 미칠 새로운 법적 판례가 남겨진 것은 아니다.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면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후임자를 지명하고 상원은 그의 자질에 대한 청문회와 표결을 거쳐 인준여부를 결정한다. 그 ‘정상적’ 절차에 따라 오바마 대통령이 2주 전 지명한 메릭 갈랜드 판사는 합리적으로는 공화당도 거부하기 힘든 후보로 평가된다. “실험실에서 이상적인 중도파 대법관 지명자를 만들어낸다 해도 갈랜드보다 더 좋은 후보는 찾기 힘들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표현한 하바드법대 출신의 그는 검사, 변호사, 판사를 다 거친 워싱턴 DC 항소법원장(연방대법원 다음으로 파워풀한 법정이다)으로 초당적 지지와 존경을 받는 아무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애플파이 같은” 법관이다.
그러나 스칼리아 사망 직후부터 시작된 상원 공화당의 반대는 여전히 완강하다. 명분은 한 가지,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차기 대통령이 지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집 잡기 어려운 중도파(리버럴진영이 원하는 진보파가 아니다!) 후보가 지명되고 공석 생긴 대법원의 교착상태가 심각해도 공화당지도부는 꿈쩍도 안 한다. 상원을 방문한 갈랜드의 면담조차 거부하며 “청문회도 안돼, 표결도 안돼”의 명분 약한 의무수행 거부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 한달 사이 그 완강한 반대의 벽에 틈이 생기기는 했다. 일부 공화의원들이 반대의 톤을 낮추기 시작한 것이다. 10여명이 갈랜드 면담 의사를 밝혔고 한 명은 이미 만났다. 주로 금년 재선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원들이다. 공화당의 ‘방해꾼’ 이미지가 득표에 영향을 준다면 지도부도 반대만 고집하기는 힘들어진다. 그들의 낙선이 상원주도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은 오바마 편이다. 최근 CNN조사에 의하면 64%가 청문회 개최를 지지하고 52%가 갈랜드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중요한 이슈로는 인정되는 ‘대법원’이 표를 크게 좌우할 핫이슈는 아니라는데 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대법원이 주요 이슈로 부각된다면 공화당의 태도는 좀 바뀔 수 있을지…아직 갈랜드의 인준 가능성은 영 희박한 상태에 멈춰서 있다.
29일의 동수 판결이 민주당 핵심 지지층인 노조의 입지를 강화시켰지만 보수진영은 “오바마 지명 대법관이 합세하여 앞으로 수십년 계속 5대 4 진보 판결을 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라고 강조한다. 설사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이 갈랜드보다 훨씬 더 진보적 대법관을 지명한다 해도 그건 그때 가서 감수할 위험이라며 지금의 싸움에선 물러서지 말라는 대 의회 압박이다.
2014년 공화당의 상원 주도권 탈환 후 상원의 새 리더로 등극한 미치 맥코넬은 “타협으로 일을 성사시키는 가장 위대한 심의기관이라는 상원의 명성을 되찾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랬던 그가 “전국총기협회(NRA)가 반대하는 지명자를 공화당이 인준하기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태연히 말하고 있다.
비상식적 선거의 해에 불거진 비상식적 상원의 버티기로 인한 대법원의 교착상태는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상원이든, 유권자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차기 혹은 차차기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도 같은 파행은 거듭될 것이다. 그땐 공화당 대통령과 민주당 상원이 대결할 수도 있다.
<
박 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