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울 때 이순신은 다정한 친구 삼곡 박경신에게 그 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한편의 편지를 보냈다.“제가 외람되이 은총을 입어 특별히 변방의 소임을 맡았으나 책임의 무거운 것이 마치 가냘픈 모기가 산을 진 것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의 과거와 오늘을 더듬어 볼 때 싹이 트기 전의 초라한 겨자씨가 생각나고 충무공 이순신의 한탄이 들려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워싱턴 정대위를 탄생시킨 겨자씨는 1992년 황금주 위안부 할머니가 캐나다를 거쳐 맥클린의 와싱톤한인교회를 방문해 증언하면서 심어 졌다.당시 여선교회장을 맡고 있던 강순임 선생은 특유의 정의감으로 여론화에 나서면서 인권 운동의 불씨를 당겼다.그러나 문제의 본질상 교회 주도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적절한 판단에 따라 1993년 사회단체로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동우 선생이 회장, 문인 이문형 선생이 상임이사로 실무 제반을 맡으면서 조직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조직이 14년 후인 2007년에 한 맺힌 위안부 문제를 HR 121 발의안으로 미 연방의회 상정과 의결을 이끌어 내면서 세계적 인권문제화에 성공하는 위업을 이룩할 줄을. 그러다 결전의 해 2007년 4월 일본 아베 수상의 워싱턴 국빈 방문을 앞두고 워싱턴 정대위는 발등의 불로 한참 법석이었고 그 한가운데 악전고투 하던 이문형 당시 이사장이 있었다.
이순신 문학상을 같이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나는 선생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백악관 아베 규탄시위에 쓸 유인물 복사비가 없어서 복사를 못하고 있다는 절망적 하소연이었다. 나는 즉각 복사비는 일부나마 내가 분담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것이 기사화 되고 동포사회 운동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부가 이어져 워싱턴포스트의 아베 규탄 전면 광고비 5만여 달러를 거뜬히 해결하고 7월에 의회 결의안 통과까지 이끌어내는 대성공을 이룩했다.
나는 얼떨결에 내가 번 적은 돈을 내 생애 가장 뜻있는데 쓰는 행운을 얻었고 이문형 이사장은 한인회장들과 연대한 범 동포대책위원회를 구성, 서옥자 당시 회장을 도와 인권 운동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김광자 직전 회장은 페어팩스카운티 청사 부지에 위안부 기림 나비상을 건립하는 쾌거를 이룩했고, 현 이정실 회장은 2015년 봄 아베 의회 연설 반대 시위를 한국일보의 모금 협조를 받아 거뜬히 성공시킨 후 위안부 인권문제를 학생 역사 교육에 연계하여 에세이 공모전을 개최하는 등 새로운 운동 방향을 참으로 시의 적절하게 설정했다고 본다.그리고 드디어 2015년 말 한일 정상간 위안부 문제 상호합의 타결을 보면서 하나의 매듭이 지어졌다.
내가 이 글을 쓰고자 한 동기는 한일간 정치적 타결 후 워싱턴 정대위의 선명한 향후 진로 설정이 역설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즉, 한일 국가 간 타결은 외교 경제 안보 등을 종합한 국가 운영에 비중을 둔 정치적 타결이지 인권운동의 타결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인권운동 단체인 정대위가 정치적 타결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고 자칫 본연의 인권운동의 기반을 해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정대위는 ‘보편 타당한 세계 인권 기준으로 볼 때 하나도 해결 된 것이 없어 우리는 인권 운동을 계속 한다’는 ‘열린 입’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일 정치적 합의에 따라 발언이 봉쇄 당한 한국 정부가 하지 못하는 말을 인권문제의 기준 내에서는 미 의회 결의의 취지에 따라 미주 한인 동포는 계속 ‘대변’ 할 수 있어 정대위는 오히려 전에 비해 더욱 긴요하고 절묘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막중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순신의 한탄처럼 모기같이 가냘픈 정대위가 산처럼 무겁고 긴요한 역할을 할 귀한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미주의 모든 한인들은 치열했던 이민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본 받아 정대위와 더불어 일사불란한 단결력으로 ‘살아 있는 입’이 되어 조국에 헌신하는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못살아서 떠났던 1세기의 한인 이민 역사가 우리에게 회심의 미소를 보내고 있다.
<이내원 전 워싱턴한국학교협의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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