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 일상의 삶에 있어서 더 없이 필요하고 소중한 단어들이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경험 없이는 자신의 내면은 물론 상대방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깊이의 심오함이나 ‘다시 하나 됨’에서 오는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없다. 이는 개인의 인간관계는 물론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국제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지난 해 12월 28일 있었던 한일외교장관 위안부관련 합의는 아쉬움이 많다. 물론 이면의 어떤 정치 외교적 필요성 때문에 서둘러 합의를 했는지는 몰라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실천을 기대하는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분명 문제가 많은 합의문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매서운 추위와 설날 연휴 속에서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들의 한(恨)과 고통의 역사를 상징하는 ‘소녀상’을 지키고, 국내외의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이 이번 합의의 무효화를 주장하는 데는 아마도 절차, 형식, 내용 등에 있어서 사과의 진정성이나 책임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부실한 합의문에 대한 실망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합의문에 ‘최종적 및 불가역적(finally and irreversibly)’이란 표현이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移轉)으로 해석 될 수 있는 문구를 둔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렵다.
내용과 절차가 부실하다 보니 합의문이 발표되자 반대와 지지로 여론이 갈라졌다. 심지어 어떤 시민들은 위안부 피해 당사자 할머니 분들이 이번 합의문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일본의 과거 범죄를 용서하고, 일본 정부와 화해를 해야 한다며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상처를 입은 피해자에게 누가 용서와 화해를 강요할 수 있는가?
물론 원수를 사랑하고,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마태 18:2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비롯하여 용서를 권면하는 동서양 성현들의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이는 피해자 당사자가 살 에이는 고통을 감내하며 깊은 성찰을 통하여 마음으로 직접 만나야 할 말씀이다. 용서는 진주조개의 진주처럼 상처에서 오는 고통과 분노, 실망과 원망, 성찰과 기도를 통하여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이며 신비로운 치유의 열매이지,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그런 덕목이 아니다. 용서는 강요할 수 없다.
누구에게 용서를 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의 권유는 피해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깊은 공감, 기꺼이 피해자와 그 아픔을 나눌 수 있고, 피해자가 고통스런 극복의 과정을 통하여 원통(寃痛)과 상처에서 벗어나 온전한 치유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비와 상련(相憐)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일부 보수 시민단체에서 위안부 할머니 분들에게 ‘이제 돈 받았으니, 용서하라’며 용서를 강요했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화해는 용서와 또 다르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간혹 용서는 가해자의 반성이나 사과가 없이도 피해자 혼자 할 수 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 할 수 없다. 화해는 쌍방으로, 반드시 화해의 상대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화해는 용서와 또 다르다.
화해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마음을 다하여 아픔을 듣고, 사죄를 말하는 대화를 하는 과정을 통하여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합의문에는 가해자의 분명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의 표현이 없다. 오히려 소녀상을 치워달라는 가해자의 요구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오만한 표현이 버젓이 들어 있다. 이는 쌍방의 마음이 담긴 진정한 화해의 합의문이라 할 수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화해의 과정을 통하여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죄가 담긴 합의문이 다시 나오도록 해야 한다.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죄의 표현이 빠진, 화해가 담기지 않은 부실한 합의문을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나 역사의 발목 잡기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미래사회 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인권운동이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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