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는 거품이 아니었다. 반짝 스타 마르코 루비오는 추락했고, 뒷심 약한 존 케이식이 또 다른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굴욕적 참패에 더해 핵심 지지층인 여성표 이탈까지, 대관식은커녕 힐러리 클린턴의 악몽이 깊어지면서 버니 샌더스 돌풍은 백인들의 뉴잉글랜드 지역을 넘어 전국 강타를 예보하고 있다 - 2016년 대선의 첫 프라이머리는 이렇게 끝났다.
오랫동안 여론조사에 투영되었던 표밭의 분노와 불안은 뉴햄프셔에서 확실한 표의 기록으로 남겨졌고, 아직도 최종 승리와는 연결 짓기 힘든 아웃사이더들의 압승은 종래 초기 경선의 역할이었던 판세 정리가 작동되지 못한 채 대선정국을 짙은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
민주·공화 양당의 전략가들이 “내가 본 어떤 대선과도 다른, 가장 예측불허의 선거”라고 단언하는 금년 경선에서 그 파장이 가장 심상치 않은 것은 트럼프 현상이다. 분노한 민심을 대변한다는 미명하에 거침없이 쏟아놓는 인종차별·성차별 주장에 표밭이 열광하고, 미디어가 덩달아 의미를 부여하면서 트럼프는 어느새 리얼리티 쇼가 아닌 정치무대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의 뉴햄프셔 승리가 확정된 직후 정치해설 사이트 ‘복스’는 “사실을 직면하라 : 트럼프가 이기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트럼프의 현주소를 분석했다. 공화당 기득권층은 벌써 몇 달째 트럼프의 승세를 평가절하 해왔다. ‘공화당 후보 트럼프’는 상상만으로도 재난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한 나머지 구체적 대응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뉴햄프셔 압승이 최종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경선에서 패하려면 누군가가 그를 이겨야 한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아직 없는 것이다. 트럼프가 스스로 망가지거나 이유 없이 사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요즘은 오히려 언행을 자제하며 트럼프 현상이 정치적 실체라는 분석과 보조를 맞추려하고 있다.
트럼프 거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막연한 기대는 대응책이 아니다. 빨리 공화주류의 후보단일화를 실현해 트럼프에 대항할 ‘누군가’를 세우고 지지층을 단합시켜야 한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유력한 주류후보로 부상했던 아이오와의 반짝 스타 루비오는 투표 전 후보토론에서 같은 주류후보 크리스 크리스티의 거친 공격에 경험부족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기대했던 2위가 아닌 5위로 주저앉았고, 뉴햄프셔에 올인해온 존 케이식이 깜짝 2위로 치고 올랐으며, 거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던 젭 부시마저 4위를 차지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이 3명 주류후보의 뉴햄프셔 득표율을 합하면 트럼프를 앞선다. 후보 단일화를 이룬다면 트럼프를 꺾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한 동안 그럴 의사는 없어 보인다. 뉴햄프셔 외엔 조직도 자금도 부족한 케이식은 자신이 현직 주지사인 오하이오의 3월 중순 경선까지 버틸 여력이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지만 깜짝 2위의 여세를 몰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날아갔다.
앞으로의 경선 일정까지도 ‘친 트럼프’ 성향이 완연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네바다, 수퍼화요일의 매사추세츠, 오클라호마 등 다수지역에서 지지율 1위에 올라 있는 트럼프는 루비오와 부시의 본거지인 플로리다에서도 현재론 1위이며, 오하이오에서도 케이식과 1위 접전을 벌이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혼전구도에서 트럼프의 입지는 강화되고 시간은 지나가는데 대응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공화당의 최후 옵션은 다음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지지층을 점점 넓혀가는 트럼프가 당 후보로 지명되면서 그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든지, 트럼프의 지지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중재전당대회로 대선후보를 지명하든지 - 어느 쪽도 백악관 탈환을 별러온 공화당에겐 원했던 해답이 아닐 것이다.
속 답답한 공화당 기득권층에 그나마 위안이라면 못지않게 안개가 짙어진 민주당의 경선구도다. 힐러리 진영이 샌더스의 압승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뼈아픈 고통이 덜어지거나, 참패의 여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주류의 전망은 공화당보다는 밝은 편이다. 앞으로의 경선 지역이 대부분 힐러리 랜드이기 때문이다. 히스패닉 표밭이 강한 네바다와 흑인 표밭에 좌우되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현재 지지율대로 압승을 거둔다면 힐러리는 다시 입지를 굳힐 수 있다. 메시지에서 인력까지 캠페인을 재정비하여 더 이상의 참패를 막는다는 전제하에서다.
앞으로 민주당의 관전포인트는 샌더스의 지지층 확대 여부, 다시 말해 “샌더스는 힐러리의 소수계 표밭을 얼마나 잠식할 수 있을까”이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비백인 민주당원의 힐러리 지지율은 65%로 압도적이었다.
공화당의 관전포인트는 주류후보 단일화, “얼마나 빨리 ‘반 트럼프’ 연합을 결성할 수 있을까”이다.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의 숙제가 무겁다. 금년처럼 유동적인 선거에서 아직 가능성이 보인다 싶은데 어느 후보가 하차를 하겠는가.
후보들만이 아니라 유권자들도 이젠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다. 선거를 분풀이용 리얼리티 쇼로 즐겼던 것은 이제 그만 끝내야 한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정치가 하나의 슬로건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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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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