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폭설로 물심양면의 기능이 잠시 마비됐던 탓일까. 요즘 심사가 매우 감상적으로 변해버렸다. 이런저런 개인 사정들을 제쳐두고 먼저 고국의 친지들과 온갖 군상들의 모습이 뇌리를 점령해 온다. 모두가 일상적인 화평을 누린다면 낭만적인 회억의 단꿈에 빠져 들겠지만 나라 전체가 방황, 혼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여 올 때면 우리 모두가 침통, 우울의 한 축을 관념속의 어딘가에 넣고 지내게 된다.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란 것이 무엇일까. 호화주택에 산다며 또는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고급 자동차를 탄다며 가난한 사람들 앞에 으시대고 목에 힘을 주는 따위의 자존심은 천박 그 자체일 뿐 뒷전에서 비웃음의 손가락질만 받을 뿐이다. 그 자존심이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주축이요, 삶의 가치의 전부일 것이다. 자존심이 없는 삶, 그 뒤에 오는 대가는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다. 자존심을 포기하거나 짓밟히거나 그런 시련에 부딪칠 경우 그 뒤는 바로 패망과 절망뿐이다.
자존심 있는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영혼을 팔지 않는다, 몸을 팔지 않는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존심의 진정한 값을 꿋꿋한 긍지로 지녀간다. 우리 속담에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는 구절이 있다. 계급적 신분을 규명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체면을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는 그런 경구일 것이다.
권력으로 순진무구한 백성을 마구 짓밟고 국민으로부터 쥐어짜낸 거액의 축재도 모자라 더욱 더 탐욕을 멈출 줄 모르는 이러한 몰염치한 현상들 모두가 자존심 없는 막장드라마가 아닌가. 국가의 고위직 장차관이거나 공무원인데 범죄를 저지르다니….
교수는 학생들 가르치는 자존심으로, 종교인은 사람들에게 설법 설교하는 자존심으로, 군인은 국가와 민족의 안전을 위해 살아가는 자존심으로 자기의 직분에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국가운영이 정상화되고 미래를 꿈 꿀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는 게 아닌가. 모두가 자기의 사명에 대한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권력자나 재벌을 꿈꾸는 막장 드라마를 써내려 가기에 급급하다면 우리 모두가 치를 대가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최근 들어 모국의 정치 상황이 참으로 장탄식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자존심이 실종된 분야를 지적하라면 서슴치 않고 우리나라 정치판이라고 단언한다. 그야말로 정치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설 정도로 빵점짜리 판국이다. 정부를 비롯하여 여야, 언론, 각 시민단체 등등 모두가 막장드라마를 연출해 내는 주인공들이 이끌어가는 것 같아 비판을 넘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정부는 벌써부터 대통령의 집권이후를 계산하는 건지 판 깨기 혼란에 앞장서고 있다. 대통령이 성실히 자기임무를 다 하다 임기를 마치면 됐지, 자기 심복들을 구태여 요소요소에 꽂아 두려는 의도가 뭔가.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이원집정부제, 내각책임제 등등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하는 건가. 친박, 비박, 참박, 복박, 진박 등등 시정잡배들의 무슨 암호 비슷한 이런 말들이 스스럼없이 유행되고 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 권력이라면 이런 하한선을 넘어가는 이 처참한 정치 풍토는 빚어내지 말아야지… 그야말로 누가 알까봐 겁이 날 정도로 부끄럽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보니 “국민이 나서 주십시오”, “국민이 해결해 주십시오”가 20여 차례 등장했다. 회견 중에 지난 일 년을 회고하고 새해의 비전을 제시하는 중에는 국민들에게 열심히 일 했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겸양지덕의 사과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서명운동에 대통령이 현장에 나가 서명하고 그 뒤를 이어 각료들이 줄줄이 따라가 서명하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도무지 대통령이고 장차관이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양상이다. 국민의 청원을 받아 들여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루루 나가서 서명운동에 참여하다니 이런 코미디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야당의 분열은 자존심이란 말을 거론조차 할 가치가 없는 진흙탕의 개싸움판(이전투구)이다. 정부국가의 일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졸렬한 사리사욕에 탐닉되어 끝 간데 없는 공방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나라발전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 정부는 정부다워야 하고 국회는 국회다워야 자존심이 있는 국가권력으로 국민의 복종과 존경심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떠나며 성명을 발표하면서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고 했다. 자존심이 실종된 한국 정치판을 아프게 질타한 것이리라.
전화 (571)326-6609
<정기용 자유광장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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