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감정이라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둘째라면 서러워 하실 나의 아버지는, 그러나 마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라는 일본 무사의 이야기는 어린시절 나에게 종종 들려 주셨다. 지난 칼럼에 게재(揭載)되었던 “필승의 신념”에서 소년 무사가 개미의 이사하는 행렬을 보고 단 칼에 원수를 쓰러트렸다는 내용은 필자가 어렸을 적 아버지로 부터 몇 번이나 되풀이 들었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당신 아들이 아무쪼록 필승의 강건한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무사시가 살았던 무렵 일본은 300년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막부정치(幕府政治)로 옮겨갈 무렵이다. 일본의 천하가 도요또미家의 것이냐 아니면 도꾸가와家의 것이냐를 판가름 하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 무사시는 도요또미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派의 아시카가軍의 무사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도요또미 파가 패주할 때 패잔병으로 구사일생 살아난 무사시는 그후 낭인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사시는 교토에 들려서 당시 최고의 검술가문인 요시오까의 수석 사범 세이지로에게 한 수 배우기를 청한다. 쉬운 표현으로 싸움을 건 것이다.
웬 촌뜨기가 왔나 싶어 가볍게 혼을 내어 쫓아내려 던 세이지로는 무사시와 단 한번 부딪히는 순간 무시시의 목검에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면 요시오까 무술학교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형 보다 한 수 위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이지로의 동생 덴시찌로가 날짜를 잡아 무사시에게 도전하게 된다.
이때 무시시는 일부러 약속시간 보다 훨씬 늦게 결투장소에 도착하였는데 추운 날씨에 밖에서 오래 기다리느라고 핏대가 머리끝까지 오른 덴시찌로가 성급한 일격을 가하자 무사시는 가볍게 뛰어올라 이를 피하면서 목검으로 덴시찌로의 두개골을 내려쳐 즉사 시켰다.
이번에는 학교 문하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세이지로의 아들이 숙부 덴시찌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무사시에게 도전장을 보냈는데 그때 그는 코흘리개 일곱 살이어서 무사시와 맞상대할 형편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명분을 세워 무사시를 불러 낸 후 문하생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숨어 있다가 보복할 요량이었다. 그것도 못 미더워서 총잡이 두 명까지 고용하여 무사시가 오는 길목을 숨어 있도록 하였으니까 무사시가 일단 여기에 오기만 하면 절대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사시는 다시 한번 적의 의표를 찌르는 심리전을 구사한다. 이번에는 몇 시간 전에 미리 와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해질 무렵에 결투 하기로 한 약속시간이 훨씬 넘어서 보름달이 훤하게 밝았는데도 무사시가 보이지 않으니까 요시오까 문하생들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하면서 “무사시가 미리 알고 이 死地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게 되었고 길목에서 숨어있던 총잡이들 조차 이제 “상황 끝”이라고 생각하여 곰방대에 부싯돌을 긋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옆에서 숨어 있던 무사시가 질풍같이 뛰어 나가서 겁에 질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떨고 있는 아이의 목을 내려 친 것이다. 그리고 쌍칼을 휘두르며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아이 어른 구분 구분없이 오직 敵手만 있을 뿐.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를 베어버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사시는 평생을 괴로워하게 하게되며 이후 칼을 손에서 놓는 직접 원인이 된다. 무사시는 말년에 한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고린노쇼(五輪의 書)이다.
책에서 무사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간단하게 서술한 다음 무사로써 가져야할 맘가짐 등을 정리해서 담았다. 그 다음 전술의 기본 원리와 실제 운용을 “땅” “물” “불” “풍” “空” 등의 다섯 개 편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땅(地)” 편에서는 지형지물에 입각한 무기 使用의 원리를, “물(水)” 편에서는 전술 운용의 최대한 융통성과 철저함이, “불(火)” 편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기민함과 격렬함이, “풍(風)” 편에서는 다른 流 학파의 비교 분석이, 그리고 “공(空)” 편에서는 이 모든 고정 개념을 초월한 경지의 전술 개념등이 서술되어 있었다.
무사시를 읽으면서 필자가 감명을 받은 것은 그의 기(氣)와 단(斷)이다. 싸울 때는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기세로 적을 제압하였지만 일단 <안 한다>라고 결단을 내리면 무섭게 끊는 것이다. 무사시는 29세까지 목숨을 건 결투를 60번이나 해서 한번도 패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검객이었다.
그러나 요시오까 일족과의 싸움에서 어린 소년을 벤 다음에는 크게 느낀것이 있어서 칼을 내려 놓고 그림과 조각으로 만년을 보냈을뿐 다시는 칼을 잡지 않았다. 검선일려(劍禪一如)라는 말이 있다. 검술이 어느 경지에 오르면 바로 선(禪)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그의 작품은 선화(禪畵)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데 수묵화로는 ‘두견새 그림’ ‘정면 달마도’ ‘야생마 그림’ 등이 구마모도 현에 있는 영청문고장 등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고, 조각품으로는 흑칠한 ‘안장’ 및 불상등이 개인소장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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