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해와 다가오는 해를 함께 일컬어 연말연시 혹은 세밑세초(歲初)라고 한다. 요즘 가는 해를 보내고(送舊), 오는 해를 맞이하기에(迎新) 바쁘다. 이 무렵이면 평소 심각하지 않던 사람도 그 마음과 삶의 태도가 제법 신중해지며, 평소 둔감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도 세상의 무상함이나 세월의 속절없는 흐름에 민감해 지기도 한다. 정든 사람 보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는 해를 보내는 일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덤덤 무심할 수도 없고, 후회막급만도, 그렇다고 마냥 매달릴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송구영신 할 것인가?
세월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는 말이 있다. 누구는 시간은 돈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시간의 일면만을 본 말이다. 창조주의 거룩한 산물인 시간이 돈으로만 비유되는 것은 비록 은유라 해도 시간의 의미를 너무 축소한 과도한 자기제한이다. 시간에서 돈 이상을 보아야 한다. 시간을 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이다. 시간이 주는 치유력이나 긍정의 망각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세밑세초에 적절한 시간 이해는 시간은 스승이라는 말일지 싶다. 젊어서 못 본 것을 세월은 보게 한다. 세월만큼 우리에게 세상의 무상함이나, 오직 한번 뿐인 인생의 소중함이나, 역사의 도도함을 잘 설명해 주는 스승이 또 있을까? 분초도 멈춤 없이 흐르는 시간은 그 자체가 우리를 일깨우고 성숙하게 하는 지혜이고 가르침이고 진리이다.
늘 안타까운 점은 대개 매년 새로운 다짐을 하지만, 한 해를 다 보내고 주어진 시간이 지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는 것이다. 한 시인은 이런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김용택 시인, 그랬다지요)
그렇다고 한 해를 보내며 지나치게 자신을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록 힘든 세상이었지만 우리는 두려움과 시련, 답답함과 실망, 다사다난의 여정과 크고 작은 장애물을 헤치고 여기까지 긴 여정을 걸어왔다. 그 하나로도 대견한 일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월의 스승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송구영신이야말로 세월을 스승 삼아 배움과 자기 성숙을 이루는 자리다.
세월을 스승 삼은 사람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만난 시련과 상처를 통하여 배우고, 세월 속에서 경험한 다사다난을 통하여 성숙해 진다. 하늘은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적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고, 삶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히고 힘들게 한다는 말이 『맹자』(孟子)에 나온다. 이는 그 사람의 마음을 깊고 넓게 하고 분발시키며 참을성을 기르게 하여, 그 사람의 단점이나 약한 부분의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후회막급이고, 성에 안차고, 하는 일과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뜻대로 안 되서 몸과 마음이 답답한 가운데 한 해를 보내는 찜찜한 마음에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세월의 스승 앞에서 배움과 성숙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세월을 스승 삼은 사람은 세월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참다운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세상은 높고, 빠르고, 크게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장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성취의 높음이나 빠름이 부질없음을 이렇게 선언한다.“헛되고 헛되다”(전도서)
오고가는 세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인생은 참다운 삶이다. 참다운 삶만이 아름답고 위대하며 영원한 삶이다. 이는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묵묵히 자기 자신과 이웃과 하늘에 성실한 삶이다. 참다운 삶이란 세상의 흐름에 등 떠밀려 인생의 속도에 치중하는 삶이 아니라, 심지 굳게 삶의 방향성과 가치를 찾아가는 삶이다.
세밑세초, 세월을 스승 삼아 삶 속에서 늘 하늘에 옳음과 선함을 묻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늘 감사하면서 살고 싶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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