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미국 정치무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좋든 싫든, 도널드 트럼프였다. 그는 공화당 경선의 사이드쇼 단역으로 출발했으나 6개월이 지난 현재는 2016년 대선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단숨에 선두주자로 치고 올라와 따로 광고할 필요도 없이 전국 미디어의 조명을 독차지하며 멋대로 어젠다를 정하고, 요란스럽게 헤드라인 뉴스를 뿜어내고 있다.
그의 거친 입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 ‘트럼프의 미국’은 그러나, 전혀 아름답지 않다. 위험하고 두려운 세상이다. 보수표밭에 만연한 분노와 공포를 재빨리 간파한 그의 무모한 정략은 오랜 세월, 끈질긴 노력으로 잠재웠던 편견과 차별을 흔들어 깨우며, 편견을 드러내고 차별을 시행해도 괜찮다고 부추기고 있다.
2015년은 사방에서 노골적 반이민 공격이 난무한 해였다. 연방의회에서, 공화당 주정부에서, 보수적 법정에서 이민들의 기본권은 잠식당했고 이민자들은 테러·범죄·예산부담 등 사회불안의 요인으로 경계의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이 트럼프다.
처음부터 그는 ‘이민’을 겨냥했다. 멕시코 이민을 강간범과 마약 밀매자의 범죄 집단으로 낙인찍었고 1,100만명 ‘불법이민’을 모조리 추방시키겠다고 큰소리치며 그렇게 하여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반이민 정책은 파리와 샌버나디노 테러이후 더욱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모든 무슬림의 미 입국을 잠정 금지하라” - 국내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비판을 불러온 그의 “헌법에 위배되는, 반 미국적” 선동 못지않게 충격적인 것은 “우리는 더 강하게, 더 악의적으로, 더 야비해질 것”이라고 외치는 그의 연설에 환호하는 청중들의 함성이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길게 이어졌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들이 오랫동안 가져온 소신이 대선 캠페인에서 말로 표현된 것에 대한 동조의 함성이었다. 그건 안도의 함성이기도 했다. 더 이상 숨죽이며 귓속말에 그칠 필요 없이 자유롭게 큰 소리로 말해도 된다는 안도가 박수갈채와 주먹질과 환호로 터져 나온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트럼프 유세현장의 분위기다.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CNN과 애틀랜틱 등 여러 미디어의 질문에 답한 풀뿌리 보수 유권자들의 대답은 비슷했다. “난 정치가를 신뢰 안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믿는다. 그는 솔직하고 터프하며 우리의 분노와 불만을 존중해주고 우리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불법이민과 테러리스트를 추방하자는 그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이민은 권리가 아니다, 특혜다…난 앵커베이비도 반대하고 무슬림도 반대한다, 우리는 그들의 나라에 교회를 세울 수 없는데 왜 그들은 우리나라에 회교사원을 가져야 하는가, 이 주장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유일한 후보가 트럼프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외국인 혐오증의 스킨헤드족도 아니고 백인우월주의 KKK단원들도 아니다. 중·저소득층의 백인 유권자들, 대부분 성실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다.
분노와 불만과 공포로 표출되는 그들의 속마음은 무엇인가. 이민의 급증으로 인구지도가 바뀌고 기술혁명과 세계화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일상은 불안해지는데 정부는 생계의 안전망이 되어주지도, 테러의 보호막이 되어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듯하여 두렵고 화나는 것이다, 이 같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보이스’를 준 것이 트럼프다. 거침없는 막말을 동원해 “성역 없는 불만 표출의 장을 마련해주었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한다.
2015년 트럼프가 내놓은 주장 77개를 검증한 사실확인 사이트 ‘폴리팩트’는 그중 76%가 허위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허위사실을 마구 쏟아놓으며 이민, 여성, 장애자…연달아 모욕을 퍼붓고 기존 정치게임의 룰을 파괴하고 있는 그의 전횡이 도를 더해가도 그의 지지율은 떨어질 줄 모른다. 갤럽조사에선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2위에도 올랐다.
‘트럼피즘’에 열광하는 보수 풀뿌리 표밭의 성원이 그렇게 뜨겁다.
‘감추지도 않고 드러낸 편견’을 핵심으로 하는 트럼피즘은, 트럼프가 경선 혹은 대선에서 패배한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그래서다. 공화당내의 자체 대응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트럼프 돌풍에 당황하지만 공화당 지도부는 이미 지난 수년간 은근히 분노와 편견을 부추겨왔고, 경선의 라이벌들은 트럼프와 트럼프 지지표밭의 보복이 두려워 트럼프 정면비판에 몸을 사리고 있다.
트럼프의 추하고 해로운 주장으로 혼란스러운 지금은 “미 역사의 위험한 순간‘이라고 경고한 워싱턴포스트의 사설은 과장이 아니다. 이민커뮤니티에는 특히 그렇다. 다행히 트럼프의 극단주의가 지배하기엔 미국은 법적 제도적 견제장치가 많은 나라다. 그러나 제도와 법이 애국심으로 포장된 공포와 불안에 의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정치적 힘을 길러야 한다. 첫 걸음은 투표다. 이민자들을 ‘강간범’으로 낙인찍고 모든 무슬림을 테러용의자로 의심하며 ‘반이민’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트럼프의 미국’에 살고 싶지 않다면, 투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고다.
<
박 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