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교회만 가면 죄지었다고 회개하라’고 하시고, ’하나님은 한사코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못하게 하신다’고 했던 노 선배님의 한담이 생각난다.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알고 모르고’, 즉 ‘인식과 몰이해’의 정도 차이가 그냥 웃어넘길 백지 한 장이 아니고 천양지차가 나는 요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야 알 듯 모를 듯이 ‘죄인’이라고 한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한들 뭐라고 하겠는가,
대저(大抵) ‘역사란 무엇인가,’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 지진이나 홍수, 태풍 등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임에도 기록으로 남긴다.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기록되고 그 기록들을 통해서 ‘문명의 진보’와 ‘인류의 미래’를 측량해 나간다고 했을 때 그 기록은 대단히 준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수없이 왜곡되고 진실이 가려져 버렸다. 수많은 인류가 명멸했음에도 단지 몇몇 권력자의 역사 만이 남아있게 된 것은 그 전달수단의 불비함도 큰 원인이라 할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진실되지 못한 기록, 끊임없이 축소은폐, 침소봉대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지배욕심과 생존본능만 존재하는 역사라면 동물들의 역사일 뿐이다. 힘 있어서 지배하고자 했고, 힘없으니 살아남아 보려고만 허둥댔으니 무슨 일들이 생기고 말 것 조차 없다. 유신때 데모하는 학생을 보고 교수가 ‘학생이 공부나 하지...’ 하니까 옆에 있던 교수가 ‘저 학생들이 데모를 안했으면 당신 자리에 육사출신이 서 있을거요‘했다 한다.
지난 14일에 서울에서 10만이 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하는 노인에게 어린 고등학교 여학생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의외로 나이들이 많지 않았었다’고 항변하는 걸 본적이 있다.
유관순이 16세였고, 신의주와 광주학생의거가 당시의 중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4.19도 학생들이었다. 18년 유신에 항거했던 이들도 학생들이었다. 고려 때 항몽의 역사,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외침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의병과 민초들의 항거, 그런대로 기록들이 잘 보존되었다고 생각되는 최근세의 독립운동사, 그들의 정의감이 오늘의 한국을 이만큼이라도 ‘한국답게’ 만들었다.
도산이 신민회를 만든 때가 29세요,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나이가 30세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이도 불과 33세였지만 세계사를 바꿔 놓았다.
나라가 외세에 침략을 당하고, 불의한 세력이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에 백성은 네가지의 선택에 놓이게 된다. ‘저항하거나, 회피하거나, 지배를 당하거나, 정복자에게 협력하거나.’ 역사에서는 두가지를 다루게 된다. 저항하는 역사와 협력했던 역사가 그것이다. 그런데 혼자 살겠다고, 살아 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앞세워 정복자에게 협조했던 것을 역사 앞에 통절 반성하기는 커녕 공동체의 가치와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구차한 자기처지와 비교해가면서 손가락질하고 비아냥대고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하고 빈정거리는 비루한 자들에게 3.1운동 직후인 1919년 매일신보에 쓴 이완용의 ‘경고문’의 축약을 알려주고자 한다.
1919.4.5.(1차 경고문) 독립이 되든지 말든지 너희 처지는 똑같으니 포기해라. 그렇지 않으면 사살할 수도 있다. 1919.4.9.(2차 경고문) 내가 매국노이지만 바른 말도 할 수도 있다. 누가 뭐라든 할 말은 한다. 독립을 포기하라. 1919.5.30.(3차 경고문) 힘도 없는 것들은 조용히 있는 게 현명하다. 당신들의 말은 우리도 다 알고 있다. 우리는 천황만 믿고 가자, 현실문제에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듯이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이 그랬다. 사경을 해매고 있는 나이 70의 농민 백남기씨가 죽으려고 거기에 가지는 않았다. 더 이상 불편부당한 세상이 없기를 바라는 일에 목소리하나 더 보태려고 아마도 그 자리에 섰을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그리스도였지만 역사는 빌라도의 폭정을 낱낱이 고발하지 않던가, 나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무슨 ‘죄인’이 되며, 누구에게 ‘빚’이 있다고 하는가, 과연 그럴까?
특히 배웠다는 사람들, 뭘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이완용의 글을 보면서 마음 밑바닥을 다시 한 번 돌아보라.
<강창구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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