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상·빨래터· 시장 사람들·아기 업은 아낙… 서민의 삶 질박한 조형미로 구현한 가난한 작가
▶ ‘귀로’기증 받은 퍼시픽아시아뮤지엄서 전시
박수근의 ‘귀로’(1964) 캔버스에 유채. 22×17인치.
박수근의 작품을 기증한 107세의 허브 눗바 옹(가운데)과 아들 존, 딸 조앤.
퍼시픽 아시아 뮤지엄의 지연수 큐레이터가 미디어 오프닝에서 작품 ‘귀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십호 화폭에
여인이 세 사람 그려져 있다.
한 여인은 아이를 업고 먼 산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느릅나무 밑을 지나가고,
다른 여인은 뚫어진 옷을 꿰매고 있다.
-중략-
광주리를 이고 느릅나무 밑을 지나가는 사람은
흡사 내 이웃 아낙네들의 몰골 같기도 하고,
또 내 어머니 모습 같다.
이슬을 밟고 들에 나가 농녀로 일하고 황혼을
이고 돌아오는 그들의 지친 몰골, 기다리는
함지박엔 극상해야 감자톨이나, 보리알 몇 알,
아, 가난하기 위하여 세상에 온 가련한 모습이여.
<‘박수근 화폭’ 황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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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사진으로만 보던 박수근 작품을 처음으로 눈앞에서 보았을 때, 고요한 파문이 일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거의 흑백으로 보이는 무채색의 색조에 우리 민족 수천년의 삶이 담겨 있었다. 단순한 선과 구도는 백자 달항아리의 무심, 아니 분청의 질박에 닿아 있었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이 거친 표면. 마치 돌이나 바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박수근만의 특징인 ‘화강암’ 마티에르(작품의 질감)가 궁금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그랬다. 우툴두툴한 표면이 주는 그림의 느낌은 이제껏 본 동서양의 어떤 유화와도 달랐다.
박수근은 캔버스에 밝은 색과 어두운 색 유화물감을 여러 차례 번갈아 칠하고 나이프로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해 돌처럼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들었다. 큰딸 박인숙(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은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 후에 덧그리기 때문에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최소 몇 달, 길면 1년이 걸렸다”며 “아버지의 그림에서는 묵은 된장 같은 느낌이 난다”고 했다.
박수근(1914~1965)이 작가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0~60년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으며 갖은 고생은 다 했던 가난한 작가였다. 아무런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그것도 당시 희귀했던 서양미술 재료를 사용해 독창적인 기법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학교에서 정형화된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당시 미술공부는 일본에 유학해야 했고, 유학파들은 모더니즘에 경도돼 있었으나 박수근은 자신의 뿌리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으며, 삶의 지층을 다지듯 물감을 쌓고 굳히고 두껍게 하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창출해냈다. 대상이 화면에 꽉 차는 구성, 원근감 없는 배치, 형태와 선묘의 단순화 또한 지금 눈으로 보아도 대단히 현대적인 기법이었다.
서양화가 이대원이 쓴 글에 의하면 박수근은 늘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구현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다.
작품 소재는 그가 자란 시골집, 고향마을의 나무, 노인, 노상, 아기 업은 여인, 절구질이나 맷돌질 하는 여인, 공기놀이 하는 소녀들… 그 당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풍경이었지만 거기서 아무도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해 화폭에 옮김으로써 서민의 삶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표현했다.
박수근과 가깝게 지낸 화가들의 회고에 따르면 박수근은 키가 크고 체격이 거대했지만 성격 자체가 한없이 온순하고 착했다. 너무 선하고 말도 없으며 아내와 가족을 평생 극진히 사랑했던 그는 근면했으며 겸손하고 성실하고 진지했다.
소설가 박완서는 미8군에서 군인들 초상화 그려주며 생계를 잇던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모델로 처녀 소설 ‘나목’을 집필했다.
“나의 그림은 유화이긴 하지만 동양화다”라고 했던 국민화가 박수근의 작품을 남가주 전시장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패사디나 소재 USC 퍼시픽아시아뮤지엄(PAM)이 오랜 후원자 허브 눗바(Herb Nootbaar) 옹으로부터 기증받아 소장하게 된 박수근 작품 ‘귀로’(Homeward Bound)가 지난 18일부터 전시 중이다. 박수근이 타계 1년 전인 1964년 그린 가로 22, 세로 17인치의 유화작품이다. 박수근 작품은 미국인 소장가들이 좋아해서 미국으로 많이 팔려 나갔는데, 이 작품도 기증자의 작고한 아내 도로시 눗바(Dorothy Nootbar)가 약 40년 전 뉴욕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박수근의 작품을 소장한 미국 내 다른 미술관으로는 미시간대학 뮤지엄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시간대학 건축과 교수로 30년 넘게 재직했던 한인 조셉 T.A. 리(작고)씨가 1962년 한국을 방문해 박수근으로부터 직접 구입한 ‘노상의 사람들’(People on the Street)이 그것으로, 2014년 조셉 리 교수의 가족들이 뮤지엄에 기증했다.
46 N. Los Robles Ave. Pasadena, CA 91101(626)449-2742, www.pacificasia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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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박수근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했고,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했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했고, 국전 추천작가로 활동했으며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말년에 한쪽 시력을 잃고도 작품에 매진했던 그는 51세에 타계할 때까지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사후에야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낙들과 아이들을 그린 그림 ‘노상’은 2006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10억4,000만원이라는 한국 최고가 기록을 세우며 팔렸다. 2007년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에 낙찰돼 기록을 경신했고, 다시 그해 5월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낙찰돼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 기록은 지난달 김환기 작품(1971년 작 ‘19-Ⅶ-71 #209’)이 47억2,100만원에 낙찰돼 8년만에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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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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