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소리를 내면 안돼!” 엄마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울먹이는 다섯 살 짜리 아이를 마루 밑으로 서둘러 밀어 넣었다.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엄마는 밤 새도록 마루 밑을 파내어 아이 하나 들어갈 조그만 구멍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독일군에게 사살 당하는 것을 마루 틈 사이로 보면서도 아이는 결코 소리를 내어 울지는 않았다...
(J.K. ZAWODNY,NOTHING BUT HONOUR 중에서)바르샤바 봉기는 유태인의 학살에 이어2차대전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 이다. 서부전선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고있었고 동부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소련군이 독일군을 급격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1944년 8월 1일 시작한바르샤바 봉기는 소련군의 주력이 바르샤바외곽에서 바로 6마일까지 도달 한 것과 때를 맞추어 일으킨 거사였다. 이 봉기의 군사적 목적은 기왕 패색이 짙어 있는 독일군에게 마지막 타격을 주어 바르샤바에서 쫓아내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목적은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에 민족주의의폴란드 독립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봉기군의 핵심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망명정부의 지휘를 받는 AK군 (ARMIAKRAJOWA:Home Army라는 뜻) 4만 명 정도 였는데 그들의 무기라고는 칼빈 소총 1천정 , 권총 2천 정에 자동화기 60 여 정에 사제 수류탄 정도였으니 이 정도 한심한 화력으로는 도저히 독일군과 힘으로 맞설 수는없었다. 그러나 AK군 수뇌부는 사태를 낙관하였다. 소련군은 바르샤바의 바로 코앞에와 있으니 일단 바르샤바에서 봉기만 일으켜서 소련군의 요청 대로 독일군의 후방을교란 시키면 곧 바로 소련군이 전선을 제압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큰 오산 이였다. 봉기 이틀째 되던 날까지 시민군은 바르샤바 시내의대부분을 점령하기까지에는 성공하나 그후부터 수비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고 대 소 작전 중이던 독일군 예비병력(주로 기갑 부대) 수 개 군단이 즉시 바르샤바에 투입된 것이다. 다시 수세에 몰린 봉기군은 이후 63일간 외부의 도움없이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한다. 봉기가 시작될 때 이를적극 지원 하겠다던 소련군은 바르샤바까지강 하나 만 건너면 되는 위치에 진격해 있었으나 봉기군이 독일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되는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른바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나치스에 의하여 완전 屠戮(도륙)될 때 까지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봉기군은 이제 각 소 단위 부대로 건물 마다 고립된 채 하나 씩 지리 멸렬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바드니 소위의 소대 본부 건물에 AK군 사령관 코모로브스키(TADEUSZ BOR KOMOROWSKI) 장군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비록 비관적인전투 상황이었지만 사령관께서 직접 방문한것은 말단부대 소대의 영광이다. 그러나 사령관께 무엇하나 대접할 것이 없었다.
그 때부상병을 돌보던 할머니 간호병이 앞에 나섰다.“ 사령관 각하께서 모처럼 방문하셨는데 우리들이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제가 음악 한 곡 들려 드려도 되겠습니까?”사령관의 허락을 받은 할머니 병사는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밖에서는 콩 볶는듯한 자동화기의 소리가, 그리고 독일군의 포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데 전에 음악 선생이었다는 할머니 병사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국의 흙 한줌을 싸들고 망명을 떠났던 쇼팽은 비록 침략군에게 유린된 조국 폴란드이지만 언젠가 다시 일어나 옛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는 신념을 환타지 선율에 담았다.
자바드니 소위는 지금 포화속에서도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자유의 함성을 이 연주를 통하여 듣고 있는 것이다. 부서진 피아노라서 몇개의 키는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할머니는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열심히 연주하였다. 이윽고 곡이 끝나자 사령관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 바르샤바 봉기에서 희생된 AK군과 시민은 20만 명. 소련군은 봉기군이 독일군 손에 완전히 섬멸된 후인 1945년 1월에야 바르샤바에 입성하여 공산 괴뢰 정권을 수립한다. 자바드니 소위는 기관총 총상을 입고도 우여곡절 끝에 살아 남아서 미국에 와서학위를 마치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민족이,그리고 나라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수 있는 능력을 잃었을 때, 그 때에는 엄청난 비극이 초래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어찌 폴란드인 만의 경험일까.
필자의 클레어몬트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자바드니(J. K. ZAWODNY)박사는 은퇴한 다음 워싱턴주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사시다가 2012년 영면(永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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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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