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길어지고, 요즘처럼 기온이 뚝 떨어지는 계절이면 한국의 온돌방이 간혹 떠오르곤 한다.
식구가 많을수록, 따스한 아랫목은 식구들끼리 부딪끼고 때로는 따스한 밥… 때로는 영혼을 보온시켜주었던 사랑의 통로이자 광장이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한국인에게 가족이란 단순히 피를 나눈 사이이기에 앞서 말그대로 食口…
즉 생사를 함께하는 삶의 동반자… 전우이기도 했다. 세상에 먹고 사는 일… 가족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오랜세월 파란만장한 풍파 속에서도 좌절보다는 늘 믿음과 희망을 싹 티우곤했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응원해 주었던 따스한 추억들…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이땅에서 유별(개성)나게 살아 남아야하는 것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힘을 받쳐주는 영혼의 또다른 기둥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살다보면, 여행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순조롭게 펼쳐질 때가 있지만 간혹 암흑기도 오게 마련이다.
이때 순탄한 삶에서는 결코 바라볼 수 없었던 빛… 마치 ‘雪國’의 한 장면처럼, 밖이 어둡기에, 기차 유리창에 투영되는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다른 세상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햇빛처럼 밝은 여행도 필요하지만 때때로 밤으로의 긴 여행도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어둠 속에서만이 투영될 수 있는 이미지… 어두웠기에 소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행으로 영혼이 더욱 살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둡지만, 어둡기에 더욱 풍요롭고, 과묵하지만 과묵하기에 맑은… 브람스, 베토벤 등 독일 예술이 주는 매력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어둠을 바라볼 수 없는 영혼은 결코 아무 것도 투영할 수 없는, 사실은 가장 어두운 영혼이다.
약 25년전 SF 심포니 홀에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었을 때,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화려한 것만 추구한 때문이었다. 브람스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이곡이 현장 연주가 매우 어려운 난곡이라는 사실도 미쳐 몰랐었다.
그 때문인지 그후 이 곡은 거의 듣지 않게 되었다. 사실 최근들어 이곡을 다시 들으면서도 브람스는 여전히 어렵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힘들었다.
그의 작품이 너무 투박하고, 지나치게 암시적이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모호하게 다가올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비록 무딘 칼날이지만 평범 속에 깃든 예지… 그 연륜의 맛을 깨닫는데 무려 2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 …
한 때 샤강의 소설 제목이 한국에서 클래식의 아이덴티티를 대표하는 문구처럼 널리 쓰였었다. 브람스를 아십니까? 혹은 좋아하십니까를 경계로 하여 클래식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재는, 마치 바로미터인양 취급한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브람스란 인물이 워낙 클래식 중에서도 내성적인 면을 깊이 다루고 있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브람스와 클라라와의 꽃피지 못했던 사랑… 그리고 신고전주의를 주장했던 그의 투박한 예술관이 다른 (낭만파)작곡가들과는 매우 색다른, 소위 클래식(입문)의 마지노선같은 이미지를 주었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최고의 협주곡이라고 추켜세울만큼 브람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자신의 음악 수첩(레퍼토리)에 브람스를 편입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브람스의 장점을 말하자면, 그의 음악을 조선의 막사발에 비유하고 싶다고나할까?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눈을 현혹하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은 마음을 열게한다. 실망만 남겼다는 (기교파)리스트와의 조우가 말해주듯 브람스는 선율미보다는 늘 음악의 내면적 향기를 중시했다.
이도다완은 일본인들이 좋아했다는 16세기 조선의 막사발을 말한다. 그 모양의 투박함이나… 평범하기는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그릇이라도 차이는 있기 마련… 부싯돌로 짓이겨 밝히는 인위적인 빛이 있는가 하면, 비록 작을지라도 영롱하게 빛나는 아침이슬이 있다. 예술은 자연스러워야할지니…
비록 평범한 밥그릇에 불과했지만, 그 조작되지 않은 평범함 속의 건강미… 비록 일그러진 선이었지만 꾸밈없는 진솔함은 아마도 클래식이 존재하는 한, 브람스의 이름을 영원하게 할… 같은 맥락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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