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우리에게 일상의 한 부분이 된다. 누구나 잠자듯 조용한 마지막을 원하지만 현실에서의 죽음은 그렇게 평화롭지 못하다. 심신이 파괴되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불치병을 두려워하고, 온갖 의료기기에 매달린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좌절하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품위 있는 마지막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최선을 다해온 자신의 삶에는 자신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에서 ‘죽을 권리’가 진지한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카렌 앤 퀸란 소송으로 안락사 논쟁이 뜨거워지면서였다. 1975년 파티에서 마약을 복용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21세 퀸란의 생명은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있었다. 부모는 환자의 죽을 권리를 주장했고 의료진은 살려야 하는 의무를 고집했다. 전국을 들끓게 한 안락사 논쟁 속에서 법정투쟁이 진행되었고 다음해 퀸란의 부모는 죽을 권리를 인정한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퀸란이 숨진 것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도 9년이 지난 후였다. 그 긴 세월동안 카렌의 부모는 매일 딸의 병상을 지켰고 미국인들은 언젠가는 자신들도 이 같은 딜레마에 부딪칠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죽음을 미루기 위해 얼마나 오래 기계에 매달릴 것인가”
그 후로도 안락사 논쟁은 1990년대 불치환자 100여명의 안락사를 도왔던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의 살인죄 복역, 1997년 오리건 주의 미 최초 존엄사법 시행, 2005년 15년 식물인간 테리 샤이보를 둘러싼 연방의회 공화당의 테리 살리기 특별법 제정 해프닝 등을 계기로 가열되어 왔다.
한동안 가라앉았던 ‘죽을 권리’가 재조명된 것은 지난 가을 29세 젊은 나이에 뇌암 말기 진단을 받은 후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선택하여 숨진 캘리포니아 주민 브리타니 메이나드의 동영상이 공개되면서였다. 시한부 환자에게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존엄사법의 적용을 받기 위해 오리건으로 이주해야 했던 그는 “난 내 집과 내 동네와 내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러나 난 죽어가고 있고 품위를 잃고 싶지 않다…나와 내 가족이 무의미하게 연장되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거부한다”면서 캘리포니아에서도 죽을 권리를 입법화 시켜달라고 호소했다.
캘리포니아 주민의 70%가 의사의 도움 받는 시한부 환자의 자살을 지지하고 있지만 입법화는 그동안 번번이 실패해 왔다. 한 차례 주민투표에 회부되었다가 부결되었고 두 번이나 주의회에 상정되었지만 반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의 완강한 반대가 요인 중 하나였다.
메이나드의 죽음을 계기로 금년초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상정된 죽을 권리 법안이 초여름 정기회기에서 좌절된 것도 가톨릭의 힘이었다. 상원 통과 후 하원에 넘겨졌는데 먼저 거쳐야 하는 보건위에서 통과에 필요한 지지표 확보를 못한 것이다. 라틴계 5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등 돌리는 바람에 보건위 통과에 필요한 지지표를 확보 못한 법안은 위원회 표결에도 부쳐지지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며 유보되었다.
그런데 8월말 주지사가 특별회기를 소집했다. 메디칼 등 의료지원 기금처리를 위한 소집이었지만 이 기회를 포착한 지지자들은 죽을 권리 법안을 발 빠르게 재포장하여 하원과 상원에서 일사천리로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원의 보건위 관문도 특별회기의 절차상 구성이 바뀌면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6개월 이하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의사에게 자살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허용한 이 법안은 이번 주 제리 브라운 주지사에게 보내진다. 주지사는 10월11일까지 서명하든 거부권을 행사하든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아무 움직임이 없으면 그대로 입법화된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지지자들은 내년 주민투표 회부를 다짐하고 있고 서명하면 내년 1월부터 발효된다.
이미 10여개 주에 유사법안이 상정된 상황에서 캘리포니아의 입법화는 ‘죽을 권리’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전환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법안을 둘러싼 찬반논쟁은 주지사의 서명여부를 압박하며 더욱 뜨겁게 치닫고 있다.
법안을 지칭하는 용어부터 다르다. 지지자들은 ‘삶의 마감 선택법’으로 명명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강조하지만 반대자들은 ‘조력 자살’로 부르며 남용되기 쉬운 자살방조 위험성을 부각시킨다.
그래도 불가피하게 죽음과 마주서야 하는 환자에 대한 민감한 이슈여서 일까, 다른 논쟁과 달리 찬반입장 모두 연민과 배려를 근거로 한다. “위험하고 불필요한 법안”이라고 비판하는 교계와 일부 의료계의 반대에도 생명존중에 대한 신념과 약자들이 남용의 희생자가 될까하는 우려가 담겨있다.
설득력이 더 강한 것은 지지 측의 주장이다. 모델로 삼은 오리건 법은 시행 18년 동안 남용 사례가 보고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법안은 10년 시한을 비롯해 여러 측면의 안전장치를 포함시켜 환자와 의료진을 보호하고 있다.
자살을 죄악으로 믿는 사람들은 계속 자신의 종교에 따르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삶의 마감 선택법’은 원하는 환자에게만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원하는 의사에게만 돕기를 허용하는 법일 뿐이다.
한때 신부가 되려고 했던 가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인생을 관조하는 70대 후반의 나이에 철학적인 브라운 주지사이니 거부권 아닌 서명으로 고통 받는 주민들에게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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