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1860년의 대통령선거
미국의 역사를 써보자면 아마 가장 어려운 대목이 Lincoln 대통령과 남북전쟁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Abraham Lincoln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고 이 아주 multi-dimensional 한 인물을 몇 장의 글로서 그려낸다는 것이 거의 무모한 일일 것 같다.
그래서 Carl Sandburg 같은 사람은 1926년과 1939년에 두꺼운책 여섯권으로 구성된 Lincoln 전집을 내어서 역사부문 Pulitzer상을 받았다. 아마 자기 생각에도 “조금 너무 길구나” 싶었던지 1957년에 한권으로 요약한 Lincoln 전기를 또 발간하였다.
Lincoln 에 대한 책이 16,000 개나 나왔다고 하며 그의 암살에 관한 책만도 125개나 되어서 미국 사람 중에서 가장 글이 많이 쓰여진 사람이라고 한다. 필자는 또 우리가 Lincoln 에 대해서 “오해” 하고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은 것도 알게 되었다.
남북전쟁 역시 몇권의 책으로도 다 그려내기 힘든 뼈아픈 “역사”이다. 전쟁, 전투과정을 쓴다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지만 더 중요하게는 남북전쟁이 미국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전쟁 이후에 미국에 남겨놓은 영향을 몇 장으로 써낸다는 것이 필자 정도의 수준으로는 무척 어려운 과제이다. 우리는 6.25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그 전쟁을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미국의 남북전쟁은 6.25 전쟁보다 더 처참했고 더크고 긴 발자취를 미국의 역사에 남겼다.
어떤 사람들은 “Lincoln 이 남북전쟁을 일으켰다” 든가 “Lincoln 때문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는등의 오해를 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곧 알게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Lincoln 이 “극단적인 노예해방주의자” 이었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수도 있으나 그는 “노예해방”의 방법에도 점진적이고 온건한 방법을 원했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Lincoln 이 반인종 차별주의자 이었음은 아래에 적힌 그의 연설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도 미국 원주민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주의적 압제정책을 썼던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Let us discard all this quibbling about this man and other man, this race and that race, being inferior and therefore they must be placed in an inferior position. Let us discard all these things and unite as one people throughout this land until we shall once more stand up and declare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Lincoln 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극열 반노예주의자” 도 아니었음은 남북전쟁 중 “왜 당장에 노예해방을 하지 않느냐?” 라는 비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한것을 보면 알수가 있다.
My paramount object in this struggle is to save the union and is not either to save or destroy slavery. If I can save the union without freeing any slave, I would do it. If I can save it by freeing all the slaves,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do it by freeing some and leaving others alone, I would also do that. What I do about the slavery and the colored race I do because I believe it helps to save this union. And what I forebear I forebear because I do not believe it would help to save the union.
Lincoln 은 ”미합중국주의자 (Unionist)” 이었다. 통일된 미합중국을 존속시키는것 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은것은 그에게 없었다.
또 한가지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전까지의 미국대통령들이 대게 국무장관, 재무장관, 전쟁부장관 등의 중요한 연방각료를 지냈거나 아니면 연방상원의원이나 최소한 주지사를 지낸 중량급 정치인으로써 전국에 알려져 있던 사람들임에 비해서 Lincoln 은 고작 Illinois 주하원의원을 네 번 지내고 연방하원의원을 한번 지낸 다음에 Illinois 주의 연방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력밖에 없는, 연방상원의원으로 출마했을 때까지 공화당 내에서나 더군다나 전국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주하원의원 이나 연방하원의원으로 재직하였을 때에는 신통한 의정활동도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개구리가 된 올챙이처럼 탁월한 대정치가로 둔갑했다. On-the-job-training 에 능숙했다기 보다는 작은 수족관의 제한으로 기를 펴보지 못하던 고래가 바다에 풀려 나온 격이었다고 보는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취임 첫날부터 큰 그릇같은 판단을하고 결정을 내린다.
자 그러면 어떻게 “변호사가 주업이고 정치는 part-time” 이었던 이 경량급 정치인이 중량급 구국정치가로 변신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854년에 창당된 공화당은 1856년의 총선결과 Know Nothing 당과 연합하면 하원의석 과반수를 훨씬 초과하는 정당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한 정당이었다. 1858년에 Illinois 주에서는 연방상원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에는 연방상원의원을 주하원이 선출하고 있었다.
Mary Todd 가 아직 처녀 이었을때에 그녀를 따라다녔었다는
5 feet 크기의 왜소한 변호사 Steve Douglas 는 이미 연방상원의원을 한번 지내고 1858년에 재출마하였다. 그의 정적은 Mary Todd 의 남편이된 6’4” 거구의 연적 Abraham Lincoln 변호사이었다.
연방상원의원선거가 주하원에 의한 간접선거이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을 청중으로 하는 선거논쟁이 필요없을때 이었지만 Lincoln 의 도전으로 Douglas 는 Lincoln 과 몇 번의 선거논쟁을 하게되었다. 키는 작지만 당찬 몸짓과 달변이었던 Douglas 는 어눌한 연설을 시작하면 곧 청중을 휘어잡는 Lincoln 특유의 연설에 매번 도전을 받았었다.
Douglas 는 북부 출신의원답게 반노예주의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공중연설에서는 양다리를 걸치는 듯 조금 애매한 소리를 하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한번은 Freeport 라는 도시에서 Lincoln 과 선거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Lincoln 은 아직 주로 승격하지 못한 영토들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Douglas 는 영토내 집권자들의 정치적 재량으로 노예제도를 허용할수도 있고 불허 할수도 있다는 애매한 주장을 하였다.
이 연설때문에 추후 남부와 북부로부터 다 비난을 받게되는 이Freeport Speech 는 Douglas의 정치생애 내내 발목을 잡는 애물단지가 된다. 주하원의 선거로 Douglas 는 연방상원의원에 근소한 표 차이로 재선되었는데 Lincoln은 이 선거논쟁의 결과로 전국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Illinois 주 공화당의 주도권을 잡게된다. Douglas는 1858년의 연방상원의원선거운동의 결과로 호랑이 새끼를 길러주었다는것을 미쳐 몰랐다.
노예제도문제로 남북간의 반목이 극한지점에 이르러가고 있던 1860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대화와 타협으로는 국가분열을 막는것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던 미국은 마지막으로 새 대통령의 정치적 지도력에 국운을 맡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와 있었다.
1860년 봄에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노예주인 South Carolina 주의 Charleston 에서 공천대회를 열었다. 남부주 대의원들은 민주당이 영토 (Territories) 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할것을 당의 정강으로 채택하도록 요구하였다. Douglas 상원의원과 북부 대의원들은 남부쪽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격론 끝에 타협점을 찾지못한 대회장에서 남부 여덟주의 대의원들이 퇴장 하면서 공천대회는 폐회되었다. 한달 후 퇴장한 여덟 주의 참여가 없이 재소집된 공천대회에서 똑같은 격론이 계속되었고 남부주들의 대의원들이 추가로 퇴장하여서 민주당은 “전국당”이라고 말할 수 없도록 분열되어 버렸다. 북부주 대의원들만 남은 “반조각” 공천대회는 Steve Douglas 상원의원을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민주당 공천대회를 퇴장한 남부주 대의원들은 Virginia 주의 Richmond 에 다시 모여서 당시 부통령이었던 Kentucky 주 출신의 John C. Breckinridge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는 영토에 노예제도가 허용되어야 하고 주들은 미합중국에서 탈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장 연소한 부통령이기도 하였는데 남북전쟁이 시작된후 남군의 장군과 전쟁부장관 으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민주당은 남과 북으로 완전히 갈라진 것이었다. 이때에 Constitutional Union 이라는 군소정당이 등장한다.
이들은 전에 Whig 당과 Know Nothing 당원들중 보수파에 속하던 사람들로써 만일 공화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 국가분열이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노예제도 문제는 완전히 기피하기로 하고 Tennessee주의 John Bell 을 대통령 후보로 공천하였다.
북부와 서부에 기반을 둔 공화당은 남부의 지지를 다소나마 얻어볼 요량으로 당내에서 보수파로 분류되는 Lincoln을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는 본고향이 남부인 사람이었고 출신이 미국의 고난한 개척정신을 상징할 정도로 고생했던 농부집안 출신이었다. 필자는 미국이 유사이래 최악의 국난을 겪고 있던 시점에서 Abraham Lincoln이 혜성처럼 나타난것은 미국이 쉽게 쇠멸하지 않을 숙명을 타고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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