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커뮤니케이션 학 박사/영어서원 백운재 대표]
a wretch / 비참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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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grace! / How sweet the sound / That saved a wretch like me!
놀라운 은혜 / 이 얼마나 달콤한 소리인가 / 나 같은 비참한 사람을 구하셨네!
내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를 뼛속 깊게 새기고 통감해야 비로소 더욱 더 놀라워지는 은혜! 18세기 중엽, 노예를 사고 파는 더러운 장사에 몰두하던 죤 뉴턴[John Newton]이 마침내 진리의 벼락을 맏고 회심해 지어 불렀던 노래, 그게 바로 Amazing Grace! 불후(不朽)의 명곡입니다.
아, 나는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자로다! 그렇게 통회(痛悔)하며 불렀던 노래 Amazing Grace! 세상 죄 짓고 감옥에서 번민하는 많은 혼[soul]들이 무심코 듣고 부르다 화들짝 깨어 달콤한 회심(回心)을 체험케 하는 그 놀라운 자비와 은총의 노래가 바로 Amazing Grace! 아, 그 놀라운 은총! 아, 그 놀라운 자비! 아, 그 놀라운 은혜! 그렇게 깨닫고 찬송하는 노래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비참한 자’입니다. ‘a wretch[어 렛~취]’입니다. 가엾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인간을 ‘a wretch’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 혼(魂)인지, 내가 왜 이토록 구제불능의 죄인인지를 뼈아프게 느끼지 못하면 ‘놀라운 은혜’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은혜가 왜 그토록 아찔하게 놀라운지를 무섭게 통감(痛感)하려면, 우선 내가 왜 이토록 ‘비참한 존재[a wretch]’인가를 뼛속 깊게 깨달아야 합니다.
의롭고 착하게 산다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는 낯선 표현일 뿐입니다. 당연한 게 은혜라 믿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놀라운 은혜’라 여길 수 있으리오? 아버지로부터 상속재산을 미리 챙겨 집을 떠난 탕자가 마침내 방탕한 생활을 포기한 채 귀가하는 장면은 ‘비참한 자’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노정하고 있습니다.이젠 더 이상 비참해질 수도 없을 만큼 바닥을 친 인생. 돼지 꿀꿀이 죽조차 그토록 탐나고 맛있게 보이던 인생. 미상불 인생(人生)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처참한 삶! 바로 그 비참한 인간[a wretch]이 놀라운 은혜와 자비의 화신인 아버지의 품으로 귀환하는 얘기가 바로 ‘탕자의 비유’ 아니던가요?
멀리서 맨발로 마중나오는 아버지를 뵈올 면목도 없는 탕자. 다만 아버지 집의 여느 노예로 받아 주시기만 해도 감지덕지할 탕자. 그는 정녕 ‘a wretch’였습니다. 실로 가엾고 불쌍한 ‘렛~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닥의 바닥을 치고 만 탕자! 아, 나같이 비참한 자를 이토록 놀라운 은혜로 거두어 주시다니! 살찐 송아지를 잡고 온 동네 잔치를 열어,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노라 환희작약하는 아버지. 바로 그분의 은혜가 그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 아! 그보다 훨씬 더욱 놀랍기 그지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아버지의 존재 자체입니다. 그런 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그 실존(實存)의 믿음이 바로 ‘놀라운 은혜’의 핵심이랍니다.
Amazing grace! / How sweet the sound / That saved a wretch like me!놀라운 은혜 / 이 얼마나 달콤한 소리인가 / 나 같은 비참한 사람을 구하셨네!
세상엔 의(義)롭게 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착하게 사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착하고 의롭다는 분들에겐 ‘놀라운 은혜’가 그렇게 ‘놀랍지’ 않습니다. 스스로 ‘a wretch [어 렛~취]’란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난 괜찮다는 거죠. I am fine! 아, 난 괜찮습니다. 그러니, 은혜니 은총이니 뭐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 겁니다.
예수쟁이들 잡아 죽이는 일에 전력투구했던 바리새인 사울이 ‘은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어, 감미롭고 아름다운 서신들을 신약성경 속에 하나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바울 서신의 압권이라 일컫는 로마서엔 이런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바로 이런 통회(痛悔) 속으로 뜨겁게 감전되는 이유는 죤 뉴턴의 "Amazing Grace!"를 들을 때의 심금(心琴)이 다시금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O wretched man that I am! Who shall deliver me from the body of this death?""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7:24] 스스로를 비참한 사람이라 거침없이 내뱉는 바울. 그리고, 묻습니다. "누가?" 나를 ... 건져내랴? "어떻게[how]?" 나를 ... 건져내랴?가 아니고 "누가[who]?" 이 비참한 나를 건져내랴? 그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구함을 받는 게 아닙니다. ‘누가?’ 나를 구하랴? “Who shall deliver me from the body of this death?" 비밀스런 화두 하나가 ‘Who?’란 단어 속에 감춰져 있음이 보이나요?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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