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초등학교 때 한 반에 43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치자. 아마 독자들 친구들 중에도 항상 1, 2등 자리 때문에 밤을 새우는 친구들이 있었는가하면 42등과 43등을 번갈아 가면서도 밤잠 한번 설치지 않는 배짱 좋은 친구들도 있었음을 기억 하시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실은 1등을 한다는 것보다도 43등이 된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는지도 모른다.
2013년에 뉴욕타임스가 비공식적으로 집계한 미국역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본 결과에 의하면 초대 워싱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하여 43대 조지 W. 부시 대통령 까지를 포함한 43명의 대통령 중 맨 꼴찌의 최열등 대통령이라는 “명예”는 이번 글의 주인공인 제15대 제임스 부캐넌 대통령이 차지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미국은 하나의 나라로써 성공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숙명적”으로 타고난 나라라고 말해왔고 국운의 위기가 닥칠 적마다 위대한 대통령이 등장하던지 아니면 국제정세가 미국에 유리하도록 변해 왔었다는 “이론”을 내세워 왔다. 그런 미국에 어떻게 부캐넌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첫째의 질문이고 만일 부캐넌 이 재선되었거나 ‘44등’짜리 대통령이 부캐넌의 후임으로 당선되었다면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것이 두 번째 질문이 된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필자의 미국역사에 대한 이론은 틀린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열등 대통령의 바톤을 물려받은 사람이 천행히도 미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제16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었다. 필자는 링컨이 그때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미국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도대체 1856년도의 미국의 정치상황이 어떠하였기에 대통령선거에서 부캐넌 같은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지, 부캐넌 이 대통령으로써 어떤 실정들을 했었는 지와 인간 부캐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하원의원인 Preston Brooks 가 상원원내 발언에서 노예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남부와 일부 남부상원의원들을 극렬하게 비난했다는 이유로 매사추세츠의 Charles Sumner 상원의원을, 의석에 앉은 채로 의식불명이 되도록 지팡이로 구타한 사건이 일어난 1856년 5월 22일 일주일 후 민주당은 제15대 대통령후보 공천대회로 신시내티에서 모였다.
미국이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던 때였던지라 대통령후보의 공천에 유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친노예주의적 법으로써 서부지역 여러 곳에서 유혈투쟁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고 북부사람들이 생각하는 Kansas‐Nebraska Act 의 입법과정에 주동했던 사람들을 제외하여야 한다는 이유에서 Pierce 전 대통령과 Douglas 상원의원 등은 일찍이 후보에서 탈락되었다. 또 남부쪽의 반발을 고려하여 노예해방주의 성향이 있는 인물들도 제외되었다. “일류급” 정치인들이 모두 제거 되고 보니 나머지는 체취가 분명치 않은 “삼류급” “무난한” 정치인들 일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재 공백’ 상태에서 대통령후보로 공천된 것이 펜실베니아 출신의 보수적인 인물 부캐넌이었는데 그는 노예제도문제가 가장 뜨거운 정치쟁점으로 가열되어온 지난 4년여 동안 다행히도 주영미국공사로 나가있어서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눈에 띠일 정도의 노예해방주의자가 아니었던 점이 남부쪽 사람들의 눈에도 들었던 탓이었다.
노예제도철폐를 거의 정강으로 삼았던 공화당은 캘리포니아의 개척공로자 John C. Freemont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고 “Free Speech, Free Press, Free Soil, Free Men, Freemont!” 를 선거구호로 내걸었다. “무지당” (Know Nothing) 은 노예제도문제로 당이 분열되어 남부 쪽에서는 Millard Fillmore 전 대통령을, 북부 쪽에서는 John C. Freemont를 공화당과 함께 공동 공천하였다. 결과는 반민주당표의 분산이었다.
부캐넌은 북부에서는 Freemont 를 상대로, 남부에서는 Fillmore 를 상대로 선거운동을 하였다. 부캐넌은 전국을 배경으로 하였으나 Freemont 와 Fillmore 는 반쪽짜리 후보들이었다. 더구나 부캐넌의 “친노예주의적 성향” 을 냄새 맡은 남부는 압도적으로 부캐넌 을 지지하였다. 부캐넌은 Maryland 를 제외한 모든 노예주들의 지지를 받았고 북부와 서부의 비노예주들 중 5개는 부캐넌, 11개는 Freemont를 지지하였다.
선거인단표 수로는 부캐넌 이 174표를 받아서 114표를 받은 Freemont 를 압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유권자득표수로 보면 부캐넌 이 183만 표를, Freemont 는 134만 표를, Fillmore는 87만 표를 각각 받았는데, 이것은 반부캐넌 표가 과반수를 훨씬 넘었고 만약 Fillmore 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Freemont 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며 신생 공화당으로서는 비록 선거에서는 패배했으나 엄청나게 “성공한” 선거이었다.
그때의 대통령선거는 노예제도폐지를 주장한 공화당에 대한 남부의 강한 반감 속에서 치러진 것이었는데 선거 기간 중 한 남부의 신문은 “만일 공화당이 승리한다면 , 그들은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 을 폐기할 것이고 노예들이 반동혁명전쟁을 하도록 하여서 우리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목에 칼을 겨누도록 할 것” 이라는 논평을 썼다고 하며 일부 남부정치가들은 만일 Freemont 가 당선되면 남부 주들은 미합중국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부캐넌 은 경력만으로 보면 대통령직 수련과정을 충분히 마친 사람이었으나 험난했던 당시의 정치상황도 있기는 했었지만 그의 재임 말에 제16대 대통령으로 공화당의 아브라함 링컨이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필두로 남부 주들이 미합중국에서 탈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주가 탈퇴하는 것을 연방이 금지할 헌법적 근거가 없다” 라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고 그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남북전쟁이 사실상 발발한 삼류대통령으로 짧은 임기를 끝내고 말았다.
펜실베니아 주의 부유한 상업인이며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부캐넌은 21세에 변호사가 되었고 1812년의 미영전쟁에 참전했다. 24세 때인 1815년에 펜실베니아 주 하원의원이 되었고 30세 때인 1821년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어 10년간 연임하였다.
41세 때인 1832년에 주 러시아 공사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고 43세 때인 1834년에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어 5년간 재직한 후 1845년에 Polk 대통령 때 국무장관이 되었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Pierce 대통령의 주영미국공사로 일하다가 1856년에 민주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캐넌 은 “국회는 국민의 재산 (노예)권을 침해할 권한이 없다” 는 등 그의 친노예주의 성향이 나타나는 애매한 소리들을 하다가 취임사에서 “앞으로 노예제도 문제는 대법원의 판결로 해결해 나가자”는 정치지도자 답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한다. 보수성향이 강하였던 대법원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기나 하였던 것처럼 대통령취임 이틀 후에 7대2 의 압도적인 표수로 ‘Fred Scot’ 라는 역사적으로 반동적이라고 보아야할 판례를 내어 놓았다.
Fred Scot 는 흑인노예가 주인을 따라 비노예주들에서 살다가 노예주인 미주리 로 돌아와서 “이제는 나도 자유인이다” 라고 재판을 시작하였는데 1, 2심에서 판결들이 오락가락 하다가 대법원까지 상소된 것이었다.
대법원 판결의 골자는 흑인노예는 미국시민이 아니며 그런 까닭에 흑인들은 “백인들이 백인들을 위해서 만든 미국헌법에 보장된 재판소송권이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노예제도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판례가 되었다. 인권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헌법에 명시된 것보다 항상 더 넓게 옹호해온 “진보적”이었던 대법원이 시대착오적인 후진을 한 판결이었다. 부캐넌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자고 나섬으로써 그의 친 노예주의 본색을 드러냈다.
부캐넌의 인간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Anne C. Coleman과 약혼 했다가 결혼하기 전에 Anne이 사망하자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대통령 재임 시에는 27세로 금발의 미녀였던 그의 조카 Harriet Rebecca Lane Johnston이 4년간 First Lady로서 봉사했다. 부캐넌의 누나의 딸인 Harriet은 9세에 어머니가, 11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여동생과 함께 고아가 되었는데 삼촌인 부캐넌 이 두 자 매의 친권 보호자가 되어서 두 자매를 교육시켰다고 한다. 주영 미국공사 시절에도 부캐넌은 Harriet을 공식석상에 대동하고 다녔는데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Harriet을 공사의 부인쯤으로 후대하였다고 한다.
부캐넌은 Harriet을 상류 사교사회에 조심스레 등장시켰는데 Harriet은 젊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First Lady의 역할을 능숙하게 잘 처리해서 후일의 재클린 케네디 만큼이나 인기 있는 First Lady로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백악관 만찬회 때에 참석자들의 정치철학, 친소관계 등을 고려해서 좌석 배치를 해놓아서 참석자들이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까지 잘 하였다.
그런 연유였던지 미국해안경비대 (U.S. Coast Guard) 는 세 척의 군함들을 ‘Harriet Lane’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36세에 은행가 Johnston과 결혼한 Harriet는 불행하게도 18년 만에 남편, 아이들과 다 사별하였다.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에 상당했던 재산을 병원 등 자선사업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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