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을 내려라(Take Down the Flag)” - 지난 며칠 이 한 마디의 뜨거운 외침이 미 전국에 메아리치고 있다. 오랫동안 남부의 백인표밭에서 정치적 신성불가침으로 간주되어왔던 남부연합기가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이 깃발은 이 지역 유산의 자랑스러운 상징인가, 미국 인종차별 역사의 수치스러운 상징인가 - 수십년 계속되어온 뜨거운 논쟁이 지난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흑인교회 총기난사사건을 계기로, 너무 오래 지연된 너무 당연한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 백인우월주의자의 총에 9명의 무고한 흑인이 살해당하는 참극이 발생하기 전에 정치가들이 해결했어야 할, 해결할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
깃발논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미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한 첫 번째 주였다. 1860년 노예제에 반대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 불과 몇 달 후였다. 이듬해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점차적으로 연방을 탈퇴한 10개주와 함께 남부연합 정부를 구성했고 동맹군을 조직해 그해 4월 발발한 남북전쟁에 임했다. 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곳도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에서였다. 그러나 남부연합 정부는 1865년 남북전쟁 패전 후 해체되었고 11개주는 연방에 복귀한다.
남부독립이라는 꿈은 실패했지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남부군의 용맹을 기리는 것은 이들의 후손인 남부인의 자긍심이자 어느 정치인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해온 민감한 이슈였다.
현재의 남부연합기는 당시 정부의 국기가 아닌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 부대의 전투 깃발이었다. 노예제 존치와 연방에 대한 반란이라는 정당화시킬 수 없는 명분을 대변하는 깃발이었지만 옛 남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잃어버린 영광을 상징했다. 그러나 남부연합기가 남북전쟁 직후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사당에 게양된 것은 아니었다.
1962년부터 의사당 원형 지붕위에 성조기, 주기와 함께 게양되었다. 남북전쟁 발발 100주년 기념이라고 내세웠지만 당시 미 전국을 휩쓴 민권운동에 대한 무언의 반발이었고 남부연합기 게양과 철거 주장이 맞선 깃발논쟁 ‘50년 과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노예제 존치에서 비롯되어 민권운동 반대를 대변하는 부정적 상징이 명백했지만 깃발을 지지하는 지역 여론은 강력했다. 94년 주민투표에서 유권자 4분의 3이 게양 유지를 지지했고 철거를 추진했던 당시 데이빗 비즐리 주지사는 재선에 실패했다.
꾸준히 성장해온 흑인의 정치력이 발휘된 것은 전국유색인종향상협회(NAACP)가 2000년 새해 첫날부터 주도한 경제적 보이콧이었다. 관광 보이콧이 시작되고 업계 리더들이 주정부를 상대로 깃발철거 요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주의회가 타협안을 통과시켰다. 고작 의사당 지붕에서 의사당 앞 남부군 추모기념탑 앞 잔디밭으로 옮기는 정도였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 진전”으로 평가받은 투쟁의 결과였다.
타협안은 깃발 철거엔 주 상하양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는 규정을 명시해 깃발을 보호했고 NAACP는 주의사당 관내에 이 깃발이 휘날리는 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어떤 행사도 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깃발논쟁은 계속되었다. 여론은 한결같이 깃발 편이어서 지난해 말에도 게양을 지지하는 백인이 73%에 달했다.
이처럼 인종차별에 대해 미지근하던 분노를 뜨겁게 불 지피며 깃발논쟁을 막바지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 지난주의 참사다. 냉혹하게 살인을 자행한 범인이 한손엔 권총을, 한손엔 남부연합기를 들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인종혐오를 상징하는 깃발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 무브먼트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미 전국이 충격과 슬픔에 휘청대는데도 정계의 반응은 더뎠다. 남부백인을 주요표밭으로 안고 있는 공화당이 특히 더 그랬다. 사건발생 첫 48시간 동안 공화당은 찰스턴 참사를 ‘증오범죄’로 부르기조차 주저했다. 공화당 대선후보 누구도 증오의 상징인 깃발을 내리라고 촉구하지 못해 “그들의 도덕적 용기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타를 감수해야 했다.
공화 대선주자들에겐 가장 중요한 경선지의 하나인 사우스캐롤라이나 백인표밭의 역풍이 두려워 궁지에 몰린 이들의 숨통을 터준 것은 이번 주초 니키 헤일리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의 철거지지 공식선언이었다. 대선주자들을 비롯해 연방과 주 양당 정치인들이 줄줄이 헤일리의 뒤를 이었고 보수적인 주의회도 철거논의 시작을 압도적으로 의결했다.
“깃발을 내려라”는 이제 앨라배마를 비롯한 남부의 모든 주들과 월마트를 선두로 전국의 유통업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깃발에서 그치지 않고 남부연합 영웅들을 기리는 동상과 기념비, 공원과 거리 이름까지, 인종역사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으로 확대되고 있다.
총기규제강화도 아닌 깃발 철거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물론 있다. 이번이 남부연합기의 종말이 될지조차 확실치도 않다. 설사 이 깃발이 모든 공공장소에서 사라진다 해도 인종차별을 종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뜻 깊은 한 걸음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오후 희생자 중 한명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상원의원인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유해가 주의사당 원형홀에 4시간 동안 안치되었었다. 두 마리의 흰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남부연합기가 펄럭이는 잔디밭을 지나는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며 검은 상복의 조문객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저 깃발이 내려진다면 최소한의 조의 표시는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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