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대통령들의 출신, 성격, 정치경력 등을 분석해보면 그들이 어떤 대통령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푸는데 다소 도움이 된다.
Pierce는 후일 주지사를 지내게 되는 뉴햄프셔 주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나 아마 일찍부터 부친의 후광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15세에 Bowdoin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공부보다는 사교생활에 더 열심을 하여 2학년 때에는 동급생중 맨 꼴지를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머리도 좋고 집중력도 강했던 사람이었던지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자 졸업 때에는 4등을 하였다고 한다.
후일 Bowdoin 대학교의 총장의 딸 Jane Appleton과 결혼을 했는데 부인은 매우 종교적 신앙심이 깊고 내성적인 사람으로서 Pierce와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성격상의 차이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끝까지 순탄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변호사가 되었는데 24세에 뉴햄프셔 주하원의원이 되었고 2년 후인 26세 때에는 주하원의장이 되었는데 그때에 그의 부친은 주지사를 하고 있었다. Pierce 부자는 앤드류 잭슨(Old Hickory) 대통령을 열심히 지지하였던 탓에 Pierce는 ‘Young Hickory ‘라는 별명을 얻었었다고 한다.
그는 29세 때에 뉴햄프셔 주의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가 33세에 연방 상원의원이 되어서 워싱턴으로 갔다. 당시에 연방 상하원의원들은 워싱턴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는데 Pierce는 이때에 남부출신의원들 과 친분이 많이 생겼으며 그것은 그의 후일 정치가로써의 행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사교생활을 즐기는 성격에다가 혼자 생활하는 외로움도 겹쳐서 음주를 많이 하였고 그의 음주벽은 후일까지도 지속되었다. 워싱턴에 따라온 부인 Jane 은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나 사교생활을 즐거워하지 않아 워싱턴의 생활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부인이 워싱턴 생활을 도저히 더 할 수 없다고 하자 Pierce 는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4년 만에 연방 상원의원직을 사퇴하고 뉴햄프셔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민주당 정치생활을 열심히 계속하면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그의 변호사업은 아주 성황 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배심원 재판 때에 능숙한 언변으로 배심원들을 쉽게 감동시켜서 재판을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Pierce는 성공적인 변호사업과 민주당 정치를 잘해오던 중 1852년의 대통령후보 공천대회에 대의원으로 나갔다가 민주당의 후보공천이 난맥상을 겪게 되자 예상하지도 못했던 무난한 대통령후보로 추대된 것이었다.
Pierce 부부는 세 아이들이 있었는데 두 아이들은 일찍이 사망하였고 하나 남았던 아이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두 달 전에 사망하여 부인은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으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에도 부인은 참석하지 않은 채 워싱턴의 하숙방에 혼자 있었다. 그의 부인이 사교활동을 원하지 않아 Pierce의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백악관에서 거의 파티를 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부인은 계속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아마 이때에도 Pierce는 자주 과음하였던 듯하다.
그는 대통령 퇴임 후 뉴햄프셔로 돌아가 살았는데 부인이 사망하여 독신으로 지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Pierce 는 그를 비난하였다고 한다. 링컨이 재선되어 새 임기를 시작한 후 곧 암살당하자 그 지역 사람들이 Pierce의 집을 포위하고 항의 하였던 적이 있었다. Pierce는 집밖에 나가서 그 모인사람들과 대화하고 설득하여 그 군중을 해산시켰다고 한다. 1853년에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Pierce가 임명한 각료들은 별로 유능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그중 특별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은 전쟁부장관에 임명된 제퍼슨 데이비스라는 미시시피 주 연방 상원의원으로후일 남북 전쟁 때 미합중국을 탈퇴한 주들이 만든 ‘미국연합’이라고나 번역해야 될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의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Pierce는 취임연설에서 영토확대주의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는데 영토 확대는 미국 내에서 노예를 쓰는 농장의 확장이 막혀가는 것을 감지한 남부 노예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새로운 영토를 얻으면 그곳을 노예제도 허가 지역으로 만들어 노예농장으로 개발해 볼 계획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주 (state)가아닌 영토 (territory) 에서는 거주백인들의 투표만으로 노예제도 허가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거주민 주권주의’(popular sovereignty) 가 적용되고 있었다.
Pierce의 취임연설은 얼핏 듣기에는 남북의 화해를 촉구할 것을 시도하겠다는 말처럼 들렸으나 그의 실제 정책은 그 발언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현 캘리포니아의 남부지역과 멕시코 북부일부를 멕시코에서 사들였고 쿠바를 사들여 보려고 스페인에 특사를 보냈으며 하와이를 취득할 움직임을 시작하였고 Santo Domingo에 미 해군기지를 설립할 것을 교섭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구매할 수 있는지를 타진하도록 하였다. 1854년에 벨지움의 Ostend에서 주영, 불, 스페인 미국대사들이 회동하여 쿠바 문제를 토의하게 하였다. 이들은 ‘Ostend Manifesto’ 라는 보고서에 쿠바는 미국의 노예농장 지역으로 꼭 필요한 곳이니 스페인이 팔기를 거절한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미국이 획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비밀보고서가 발각되어 신문에 보도되자 Pierce는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 이라고 발뺌을 하였으나 영토확대주의는 노예농장 확대를 의미한다는 것과 Pierce는 친 노예주의자라는 낙인을 미국사람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1850 년대는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건설이 한참 진행되던 때이었다. 미국 중동남부의 여러 도시들이 철도의 종착역이 되어보려고 엄청난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후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아브라함 링컨에게 패배한 일리노이 주 연방상원의원 스티븐 더글라스는 시카고를 종착역으로 만들기 위해서 남부주의원들의 표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었다. 상원의 중진의원이었던 더글라스는 반노예주의자였으나 시카고의 종착역화를 위해서 남부의원들에게 노예제도의 확대를 암시할 수도 있는 법안을 미끼로 제안했다. 1854년에 Pierce 대통령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서 ‘Kansas-Nebraska Act’ 라는 법을 9개월간의 장기 토론 끝에 제정되도록 하였다.
미국의 미개발 지역이었던 현재의 캔자스 주와 현재의 네브라스카 주인 지역을 정식주로 승격하기 바로 전단계인 영토(territory)로 만드는 법이었는데 문제는 이 두지역이 노예제도를 금지하기로 이미 결정된 북방한계선 위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토”는 국회의 간섭 없이 거주민들의 투표만으로써 노예제도허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인 까닭이다.
더글라스는 “이 법을 만들어줄 것이니 노예제도 허가여부는 당신들 능력껏 해보고 그 대신 시카고가 철도의 종착역이 되는 결정에 찬성해 달라”고 흥정해서 시카고가 결국 철도의 종착역이 되었다. 자기 지역구의 이익을 위해서 이 법을 제정한 더글라스는 이 법이 후일 미국역사상 얼마나 큰 비극이 일어나게 만들었던 지를 미처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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