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방에는 크고 작은 보따리들이 있다. 워낙 깔끔하게 그때그때 정리하지 못하는 타입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일 끝나기가 무섭게 시작되는 다음 일들을 처리하느라 각각 다른 일 보따리들이 쌓여있는 것이라고 해 두자. 그 중 하나 눈에 띄는 것이 플라스틱 비닐 백이다. 그 안에는 몇 달 전 우리 사무실을 찾았던 한 청년에게 주려고 준비해 두었던 옷과 신발이 들어 있다.
언제였을까? 올해 2월 초쯤으로 기억된다. 뭔가 할 말이 있다고 머뭇거리는 청년이 있다고 리셉션 봉사자 선생님이 나를 찾으셨다. 방에서 나와 클라이언트 대기실 쪽으로 가 보니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고-창백하기보다는 파리해 보였다는 편이 더 맞을 듯싶다- 힘이 없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어떤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는데, 머뭇머뭇 말을 잘 못 한다. 나는 ‘뭔가 하기 힘든 이야기인가 보다’ 생각하고, 내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 방에 온 후에도 그분은 여전히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순간 나는 ‘이분이 어디가 편찮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하는 나의 질문에 그분의 입에서는 정말 의외의 말이, 풍선에 마지막 남은 바람이 빠져나가듯 힘없이 흘러나왔다.
“제가요, 지난 3일을 굶었어요…. 지금 말하기가…..” 아니 이럴수가… 나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었다. 대학생인 내 아들보다 그저 너댓살 정도 더 먹어 보이는 청년이 먹을 것이 없어서 (사먹을 돈이 없어서가 더 맞는 표현이겠다) 3일을 굶었고 지금 너무 힘이 없어서 말조차 할 기운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 한 편 어딘가가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는 미국 땅 한 켠에서 나의 필요를 채워줄 자원이 고갈되었을 때, 밥 한끼 제공해 줄만한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분들에 대한 연민과 긍휼함과 안타까움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분을 사무실 안의 작은 간이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아침에 직원들이 함께 먹고 남겨두었던 빵을 물과 함께 천천히 드시게 했다. 그리고는 사회복지사 선생을 찾아서 현재 그분의 어려움이 어떤 것인 지 어떤 도움이 긴급하게 필요한 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통해서 이분이 몇 달 전에 직장을 잃고 남은 돈도 다 쓰고 집세도 못 내서 집에서 쫓겨나오고 현재는 노숙자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젊은 분이고 기본적인 영어도 할 수 있고 구직의 의지가 강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분이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돕는 일에 일단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일단 당장 먹을 것을 살 수 있도록 어느 교회에서 도네이션 해 주신 식품점 선물권을 드리고, 구직을 위해 여기 저기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전화 카드를 구입해 주었다.
다음 날에 왔을 때는 근처 한인 가게들에 인터뷰를 가야하는데 몸을 씻고 머리를 손질해야할 것 같다고 해서 ‘긴급 구제비(emergency fund)’로 책정되어 있는 약간의 펀딩에서 이발소 비용을 마련해 드렸다. 그리고 다음 날에 다시 연락이 왔다. 취직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 구두와 옷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빨리 일자리를 찾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사재를 털어 근처 중고물품점(thrift shop)에 가서 신발과 옷을 사고, 집에서 아들 아이의 옷 몇 가지를 골라서 보따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며칠 후 연락이 다시 왔다. ‘어찌어찌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게 되었고(아마 일하게 된 곳에서 얻게 된 것 같았다), 일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지금까지 다시 우리 사무실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뜻 일게다.
그래서 결국 그 청년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보따리는 그대로 내 방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언젠가 일이 있어 그 청년이 다시 우리 사무실에 오면 전해주리라는 바람에서 두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에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 주위의 어려운 분들을 기억하는 기념품이 되어 버렸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내 방에 들어오며 그 보따리에 눈길을 준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되뇌인다. “힘내십시오!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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