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영국식민지시대 초기에는 여자들은 가사를 돕는 일만 배우고 학교도 가지 않았으며 집에서 글 읽기 공부도 하지 않아서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성 절반은 자기 이름도 쓸 줄을 몰랐다. 영국의 법이 미국식민지에 그대로 건너와 결혼한 여성의 존재는 남편을 통해서만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결혼한 여자에게는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아서 여자의 재산은 결혼하면 남편의 소유가 되었고 여자가 일을 해서 급료를 받아도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허락 없이는 유언장 (Will)도 작성할 수 없었다.
1830년대에 소학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남자 아이들만 교육을 받았고 1860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주에서 무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고등학교가 전국에 300개 정도 있었는데 그중 100개는 매사추세츠 주에 있었고 도합 6천여 개의 academies 라는 소학교 비슷한 사립학교들이 전국에 있었으며 가난한 아이들로 부터는 소액의 수업료만 받았었다. 교육시설이 많이 확충된 1890년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8학년 교육으로 학교공부를 끝내었다.
교육개혁주의자들의 노력으로 1840년에 이르러서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거의 모든 여자들이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본격적인 대학교육은 한참 더 기다려야 했었다. 처음에는 소수의 여자아이들이 남자소학교에 가도록 허락되었다가 여성고등 학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하버드대학이 설립된 지 200년 후인 1836년에 조지아 주에 최초의 여성대학 웨슬리안 칼리지가 설립되었고 그 다음해에 오하이오 주의 Oberlin College에서 남녀공학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남자와 여자가 같은 강의를 듣고 상호간에 학문적인 동등인으로 존중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나 여성들이 국민의 기본권인 투표권을 얻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취직, 직종, 승진과 급여 등에서 받는 차별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결된 문제들은 아니다.
보스턴에서 학교교사를 하던 Dorothea Dix는 형무소 여성감옥에서 일요일에 죄수들을 가르치면서 참혹한 형무소의 실정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정신병자나 정신박약인들을 죄수처럼 형무소에 가두고 고문도 하고 매를 때려서 강제로 굴종하게 만들고 참혹하게 학대해오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일반사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일어나고 있는 관행이었던 듯하다.
Dix는 2년간의 조사 끝에 1843년에 매사추세츠 주 의회에 이들 정신박약자 학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여성의 이와 같은 보고서는 묵살해버리는 풍조가 있었던 탓에 Dix 는 남성의 협조로 남자이름으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처음에는 이 보고서를 일반주민들이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이런 사회문제 제기에 비난까지 했었다.
Dix는 유럽과 미국의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이 제도의 개혁을 위한 연설을 하고 다녔다. Dix의 꾸준한 개혁운동으로 매사추세츠 주는 최초로 정신병원들을 설립하고 정신병자와 정신박약자들을 환자로써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주가 되었다.
“진리는 신학 등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들은 천당에 이르는 길을 자기가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호전적인 영토확장주의, 노예제도 등을 반대하며 사회제도개혁을 주장했던 Ralph Emerson 과 Henry Thoreau 등과 같은 사람 들이 신봉했던 ”초원론주의”(Transcendentalism) 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성행하였다.
초원론주의자로서 언론인이었던 Margaret Fuller는 ‘Woman in the 19th century’라는 책을 1845년에 써서 여성의 동등한 교육권과 직업권을 주장하여 초기의 여성동등권주의자가 되었다. 그녀는 하버드대학의 도서관을 쓰도록 허가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1848년 7월에는 뉴욕주의 Seneca Falls 에서 Women’s Rights Convention 이란 여권신장 대회가 열렸는데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All men are created equal”이라고 선언했던 것을 인용하여 “All men and women are created equal.” 이란 선언서를 채택하고 여성에게도 모든 미국시민의 권리를 부여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들 중에 “여성의 투표권을 달라”는 것이 포함되었었는데 대회에 참가한 여성들 중에는 “투표권요구는 너무 지나친 주장” 이라고 생각했던 여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여성대회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자 여권신장 운동을 저지하려는 남성들이 대회를 방해하는 어리석은 일들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1851년에 오하이오 주의 Akron 에서 열린 여성대회가 방해를 받는 중에 어느 목사가 “여성은 남성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라고주장하자 원래는 뉴욕에서 노예로 태어났던 Sojourner Truth 라는 당당한 체구의 흑인여성이 단상에 올라가 자기가 노예로서, 여자로서 혹사당하고 천대를 받을 때 남자의 도움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평등권을 주장하여 대회장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메시지는 미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Susan B. Anthony 와 Elizabeth Katie Stanton 등의 여성운동 지도자들은 “남자 같은 여자들” 이란 비난을 개의하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여서 뉴욕주가 첫 번째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개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여성의 재산관리권, 자기 자녀들에 대한 평등한 친권 행사권, 소송권, 이혼법의 완화 등을 받아내었으나 투표권은 아직 받아내지 못하였다.
1853년에도 전국잡지인 Harper’s New Monthly는 ‘여성투표권’이란 것은 이교도적인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반성경적이며 자연법과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논평을 썼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면허를 받은 여성의사, 대학교수가 된 여성, 천문학자도 나왔으며 유명한 전국잡지에 편집장들이 나오는 등 여성선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여성들을 힘든 가사일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전에는 여성들은 집에서 솜에서 실을 뽑아 (까닭에 나이 들고도 시집못간 노처녀를 ‘old spinster’라고 불렀음) 손수 옷감을 짜서 자기나 식구들이 입을 옷을 만들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솜에서 시작해서 기성복을 만드는 일까지 공장에서 처리해주었으므로 여성들이 집에서 손수 만들던 옷보다도 더 쌌으며 품질과 디자인도 훨씬 아름다웠다.
가사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자기가 원하면 집밖에서 급료를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될 수 있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에만 의지해오던 미국여성들을 남성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초등교육이 확대되고 의무화되기 시작하자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교사로 많이 일하게 되었다.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과 독립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오빠는 격렬한 노예해방주의 지도자인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그자신도 목사의 부인이 되었던 Harriet Beecher Stowe여사는 도주한 노예들을 미국 어디에서나 체포하여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규정한 ‘The Fugitive Slave Act of 1850’이 입법되자 “이제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노예제도 국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자기가 직접 관찰한 노예들의 참상과 노예들에게서 들은 체험담 등을 토대로 1851년부터 신문에 노예제도의 잔학성을 폭로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노예제도 찬반자들 간에 서로 방화하고 살인하는 일들까지 일어나고 있었던 때인지라 이와 같은 강열한 반노예주의의 글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 연재소설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신문사측에서 그 글들을 책으로 출판할 것을 권유받아 그녀는 1852년에 ‘The Uncle Tom’s Cabin‘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나오자마자 미국의 출판역사를 뒤집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전 세계에 번역판들이 출판되고 연극으로도 상연되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차후 조금 더 상세하게 쓸 예정이다. 미국역사가들 중에는 Stowe 여사의 책이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Abraham Lincoln이 당선되도록 하였다고도 하며 1861년도에 시작된 남북전쟁 시작의 촉매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Underground Railroad’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지하점조직을 연결해 노예들을 캐나다나 미국의 비노예주로 “운송”해준 이“지하열차”의 가장 유명한 “여객전무”는 Harriet Tubman이었다. 그녀는 노예출신으로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1849년에서 1861년까지 사이에 삼백여명의 노예들을 구출해낸 여걸이었다.
2015년 5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Andrew Jackson, Martin Van Buren 두 대통령을 이어 미국화폐 20달러짜리에 초상화가 올라가야할 여성후보자로 Harriet Tubman이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부인 Eleanor Roosevelt 여사를 누르고 1위로 뽑혔다고 한다. 아마 미국적인 속죄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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