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커뮤니케이션 학 박사/영어서원 백운재 대표]
Communication /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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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오직 너희 대화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얼 맞는 지인들이 모여 공통 관심사를 나눕니다. 이런저런 대화 중, 결국 마지막 질문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입니다. What is Truth? What is the Truth? What is the Ultimate Truth? 궁극적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왓이즈 츠루뜨?” 귀결점은 늘 같습니다. 늘 그 질문입니다. 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라. 가도가도 그 자리, 와도와도 떠난 그 자리.
"And ye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또 너희가 진리(眞理)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렇게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진리’는 과연 무엇을 두고 이르시는 말씀인가? What is Truth? What is the Truth? What is the Ultimate Truth? 궁극적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저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붓다의 길을 걷는 이는 모든 사념이 끊어진 상태, 즉 ‘니르바나’를 진리라 합니다. ‘Nirvana’는 화염이 꺼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생각의 불꽃들이 모두 꺼지면 진리가 드러납니다. 인도의 성자들은 꺼진 에고의 자리에 늘 그렇게 있는 ‘참나’를 진리라 합니다. "I Am That!" 아이 엠 댓! 그렇게 아는 걸 진리라 하지요.
But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오직 너희 대화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성경(The Bible)이 말하는 진리는 사뭇 다릅니다. 개인의 생각이나 깨달음을 넘는 통사(通史)적 실체가 바로 진리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들을 귀’가 열린 사람에겐 진리가 저절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ear’로 ‘hear’하면 ‘heart’에 새겨집니다. 귀로 들으면 가슴판에 아로새겨집니다. ‘귀’와 ‘듣는다’ 그리고 ‘마음’이란 영어 단어엔 모두 ‘귀[ear]’가 들어 있습니다. 그만큼 ‘듣는 게’ 중요합니다. 귀는 마음의 입구라 합니다. 입은 마음의 출구죠. 귀를 통해 마음에 들어오고 입을 통해 마음이 나갑니다. 그렇게, 귀와 마음은 모두 ‘ear’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 <창세기>에서 마지막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성경의 맥은 명료합니다. "주(主)를 두려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더도 덜도 아닙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 한마디로 그러합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경외와 사랑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있죠. 하지만,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이 곧 역사(歷史)임을 알라는 겁니다. History is His Story! 그분께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어가는 <그분 이야기>를 귀 기울여 경청하면 바야흐로 ‘Revelation’ 즉 ‘드러냄’이 보입니다.
But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오직 너희 대화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신문방송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 땅으로 유학온 게 1982년.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란 두루치기 학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게 1988년. 그리고 귀국해 대한민국 1호 박사/PD가 되려던 꿈을 접고, 1989년 다시 도미(渡美), 또한 ‘알 수 없는 힘’의 역사하심으로 미국 대학교수로 자의반타의반 사반세기가 훌떡 지난 후, 이제야 비로소 ‘커뮤니케이션’의 진짜 뜻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진리는 어물쩡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진리는 단호합니다. ‘이거다저거다’ 할 일이 아닙니다. ‘믿거나말거나’는 더더욱 아닙니다. 진리면 진리이고 진리 아니면 아닌 겁니다. 반쯤 진리이고 반쯤 거짓이면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 거짓은 거짓입니다. 양자택일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진리란가르침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홀로 외롭다’ 합니다. 좁은 길이요 도반이 드문 길입니다.
요즘 대통령의 통치학을 논하면서 ‘소통’이 자주 거론됩니다. 소통부재니 소통의 달인이니 하는 표현들이 다반사로 등장합니다. 30년 전 제가 ‘커뮤니케이션’을 들먹이면 무척 생경한 느낌으로 대하던 사람들이 이젠 많이 고상해진 셈이죠. 그만큼 세상이 빨라지고 분주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yes’에는 명쾌하게 ‘예쓰!’하고 ‘no’에는 단호하게 ‘노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장 효과적인 소통임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닌데 맞다 하고 맞는데 아니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가짜가 판치고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그 와중에, 진짜를 진짜라 하고 가짜를 가짜라 하는 명철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것들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느니라."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예/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것, 그게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요점이요 진리의 실체니라, 그렇게 듣습니다.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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