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에 목이 부쩍 굵어진 남편이 환자복을 입고 병원을 휘적휘적 돌아 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옵니다. 2주 남짓을 줄곧 하얀 쌀밥에 고추가루 투성이인 김치와 김치찌게가 남편 몸무게에 기여한 바가 클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본 입맛은 챙기는 양반이라 잡곡 하나 섞이지 않은 숙소의 하얀 쌀밥이 마음 놓고 남편 몸에다 진을 치는 모양입니다. 심한 앨러지와 비염으로 숨 쉬기도 불편한 남편이 드디어 오래 참아 왔던 수술을 결심하고 한국에 왔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햇살과 산들거리는 바람이 온몸으로 휘감아 도는 한국의 4월은 그 상쾌함이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알콜 냄새 가득한 병원 복도나 병실에도 화사한 봄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간간히 흘러 나오는 환자들의 신음소리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아지랑이 스물스물한 봄볕이 그리워 서둘러 병원 복도를 빠져 나옵니다. 유난히 봄을 많이 타는 나는 그동안 개나리가 노릇노릇한 한국의 봄을 만나면 진하게 취하곤 했습니다. 가슴이 싱숭생숭 영락없이 연애하는 기분이 됩니다. 그토록 은밀한 느낌은 왜 오는 건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야릇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던 한국의 봄 한가운데 다시 서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전에 없던 한국에서의 홀로서기입니다. 물론 며늘아이가 꼼꼼하게 정리해 준 홀로서기의 지침서가 든든한 도움이로 대기 중이긴 합니다. 사당역 근처에 미리 정해 놓은 숙소가 있어 밤 늦게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24시간 밥과 김치가 준비 되어 있다는 이곳은 우리 부부가 한 달 정도 머무를 은밀한 거처입니다. 1인용 메트레스 하나 달랑 놓인 방바닥이 남편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는 이곳에서 앉은뱅이 냉장고와 책상 위의 투박한 텔레비젼이 한동안 우리가 누릴 호사입니다. 사당역에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은 동네지만 관악산을 등지고 있어 공기가 맑고 조용합니다. 일요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이 다문다문 있어 높직하게 뻗어 있는 동네길이 크게 적막할 새는 없습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용히 숨어 지내기로 한 이번 한국여행은 우리 온 가족이 입을 모아 비밀리에 모의한 일입니다.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사당역 4번 출구는 해가 기웃해질 때면 온통 먹거리 포장마차가 줄을 섭니다. 꼼장어, 어묵, 홍합탕, 튀김, 뿌연 등불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면 어둠이 막 내리려던 사당역 거리는 활기가 돕니다. 집으로 향하는 도시인들의 지친 하루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도대체 미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 진기한 풍경이 눈이 오는 겨울에도 계속되는지 궁금합니다.
먹음직스럽게 보인 닭꼬치에 재미를 못 본 우리 부부가 그중 만만하게 들리는 곳은 붕어빵집입니다. 기름지지 않아 좋고 크게 달지 않아 좋은 붕어빵을 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합니다. 검은 세라복에 하얀 넥타이를 메고 책가방을 못 이겨 끙끙 대던 여학생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서도 우적우적 밥을 이기지 못하는 막내딸이 안타까운 어머니가 아침이면 이따금씩 용돈을 쥐어 주시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 오는 길에 사 먹으라는 붕어빵 값입니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의 봄 한가운데 서서 왜 늘 가슴이 먹먹해지는지 나는 압니다. 그렇게나 진하게 취하곤 했던 고국의 봄도 어머니가 늘 불어 주시는 입김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동네 담모퉁이에 피어 오른 소담스런 목련이 내 먹먹한 가슴을 애써 토닥여 주는 이 봄, 한결 같이 찾아 오던 싱숭생숭은 영 소식이 없습니다.
마누라 속마음이야 짐작할 리 없는 남편입니다만 30여년을 한솥밥 먹는 처지라 그나마 같아지는 건 입맛인가 봅니다. 하고 많은 음식 중에 붕어빵이냐고 핀잔 주지 않은 남편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어차피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병 끌어 안고 청승 떨 재주는 애초 없는 두 사람입니다. 혀 꼬부라지게 늘어 놓을 시덥지 않은 얘기 또한 있을 리 없지요. 그래도 뜨거운 붕어 한 마리 후후 불며 걷다가 기어이 한마디 툭 던집니다. 먹거리 많은 한국에서 우린 웬 궁상이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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