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커뮤니케이션 학 박사/영어서원 백운재 대표]
Judge Not! / 비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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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면하려면.
집을 나갑니다. 출가가 아니라 가출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챙기는 영악한 아들입니다. 두둑히 챙긴 돈으로 먼 곳에 가서 질탕하게 삽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방탕하게 삽니다. 마침내 …… 쫄딱 망해 …… 돼지 꿀꿀이 죽도 훔쳐먹는 참담한 인생이 됩니다. 그러다, 생각해봅니다.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이것보단 낫지 않은가? 나도 이젠 집으로 돌아가 ‘회개하고’ 새롭게 살리라. 그렇게 …… 집으로 돌아오니, 저기 먼발치에서 계신 아버지, 맨발로 뛰어나와 반깁니다. 새롭고 멋지게 단장시킨 후,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모든 걸 용서하고 조건없는 사랑으로 탕자를 포용하는 아버지. 그분의 한없는 사랑에 모두 찬탄합니다. 할렐루야! 아버지의 사랑은 위대하도다!누가복음 15장은 그렇게 탕자의 비유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That’s not all! There’s something more. 뭔가 사족같은 내용이 끝에 붙어 있습니다. 뱀다리처럼 별로 의미없이 지나가도 될성싶은 얘기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주의깊게 살피지 않으면 부록 정도로 읽고 마는 내용입니다. What’s the story? 바로 큰아들 얘기입니다. 늘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일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온 형님 얘기입니다.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면하려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그렇게 끝나면 해피엔딩이 될 얘기. 그런데, 잔뜩 노(怒)한 형님이 아버지께 따집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What the hell! 이게 뮙니까? 오늘도 밭에서 열심히 일하다 돌아오매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바로 그 흉악한 동생이 그 많던 재산 몽땅 까먹고 이제 알거지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 벌어지는 일이라니! 이게 도대체 뭡니까? 그러자, 아버지 가라사대,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허걱! 아니 이게 무슨 궤변인가! 똑바로 사는 자는 홀대(忽待)하고 방탕으로 인생 망친 자는 후대(厚待)하는 것, 그게 과연 진정한 의(義)란 말인가?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면하려면.
<법화경>에도 이와 비슷한 "장자(長子)와 궁자(窮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서, 장자는 부처님이요 모든 불자는 궁자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같은 사랑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라는 거죠. 붓다와 예수, 결국 같은 진리를 관통합니다. 그런데, 형님 얘기는 예수님 비유에만 나옵니다. 부처님은 뱀다리를 자르셨다? “허공의 뼈”라든가?예수회 사제이며 저명한 저술가였던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Return of the Prodigal Son]>를 보다가 심한 충격을 받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자신은 매우 책임감이 강하고 전통적이며 가정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중략] ……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연중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나의 독선을 보았다. 나는 분명 큰 아들이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그 그림은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 신비의 창이 되었다.”뭘 본걸까요? 렘브란트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특히, 오른편에 서 있는 형님을 눈여겨봅니다. 뭔가 독선[獨善, self-righteousness]같은 게 느껴집니다. ‘내 안의 큰 아들’이 보입니다. 돌아온 탕자도 탕자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형님도 하나님의 의(義)를 떠난 탕자입니다. 누가 더 탕자인가는 무의미합니다. 둘다 탕자일 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리오? 성경에서 거룩한 인물 중 하나인 욥[Job]이 결국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는" 모습. 그걸 형님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겁니다. 렘브란트 그림 속 형님의 콧대가 왠지 선명합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게 아닙니다. 거룩한 이나 흉악한 이나 진정 거룩하신 분에겐 모두 탕자입니다. 개는 개이듯, 사람은 사람입니다. 너나 나나 모두 탕자! 결국 가장 지혜로운 이는 비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명(自明)합니다.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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