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계를 본다. 새벽 4시 50분. “아직 동트려면 멀었네. 십 분만 더 자게 둘까?” 다시 뒤척거린다. 뿌연 어둠 속, 시곗바늘은 아직 그 자리다. “이젠 깨울까? 밥에 약 섞어 먹이고 더 자게 두면 되겠지?” 날이 새는듯하면 먼저 일어나 혹시나 내가 깨지 않나 싶어 내 방을 기웃거리고 흘끔거리는 녀석이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인걸 아나 보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마지막 날. 인생은 먹기 위해 산다는 철학(?)으로 꽉 찬 녀석, 먹을 것만 주면 그지없이 신 나는 녀석, 그런 녀석을 굶겨 보낼 수야 없지. 지금 밥과 약을 먹여야 아홉 시 쯤이면 속이 비어 멀미해도 토할게 없을 거다. 일어나 꼬마의 방으로 간다. 발이 천근이다. 여느 날 같으면 내가 밥그릇 다치는 낌새만 보여도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기쁨의 만세를 온몸으로 외쳐대는 녀석이다.
“아니, 주인아줌마 어떻게 된 거 아냐? 아직 캄캄한 밤인데 내 밥을…?” 싶은가보다. 커다란 눈을 껌벅댄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는 눈치다. 꼬리를 요란스레 쳐 댄다. 밥 속에 멀미약 반 알을 넣었다. 약이 들었건 어쨌건 상관없다. 먹거리라면 게 눈 감추듯 싹싹 핥아 치우는 놈이다. 세상만사가 무슨 상관이랴? 먹을게 젤이지. 밥그릇에 고개 박고 급하게 먹어 치운다. 그 모습이, 그 모습이 가슴에 찡하다. “체할라. 천천히 먹지….”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벌써 혓바닥으로 빈 그릇을 핥는다. “오늘은 횡재했네!” 싶나 보다. 입을 쩝쩝 다시고는 느긋하니 기지갤 켠다. 다른 뭐 신 나는 일은 없어요, 하는 눈치를 보낸다. 난 녀석을 꼬옥 안는다. 쓰다듬는다. “아직 이르니까 좀 더 자. 알았지?” 중얼거리고 녀석을 장 안에 넣어 준다. 나도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잠은 커녕 눈하고 가슴이 쓰리고 아파 미치겠다.
일곱 시.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한다. 꼬마 방에 있는 물건들을 상자 속에 넣기 시작한다. 꼬마와 눈 맞추지 않기 위해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녀석의 먹이, 머릿솔, 눈약, 치약, 장난감, 잡히는 대로 넣는다. 손녀딸이 사서 보내준 토끼 인형, 상자에 넣기 전에 쥐고 한참을 내려다본다. 꼬마가 날 보고 짖는다. 갖고 놀잔다. 못 들은 척 다시 짐 싼다. 꼬마의 밥그릇, 물그릇도 씻어 넣는다. 꼬마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캉캉댄다. “뭐하는 거예요?” 묻는 듯. 눈물 콧물이 쑥쑥 삐져나온다. 구겨진 내 얼굴이 걱정스런 모양이다. 왜? 왜가 가득한 눈으로 자꾸 날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꼬리는 흔든다. “아줌마, 왜 그래요?” 구루마를 갖다 놓고 꼬마의 살림살이를 싣는다. 그리곤 현관으로 끌어다 놓았다. 꼬마의 장 속에 요와 이불을 깐다. 거기에 꼬마를 넣는다. 꼬마가 이불 속에 들어가 신 난다고 뒹군다. 꼬마의 장도 밀어서 현관에 놓았다. 녀석의 살림살이는 이게 다다. 꼬마는 부엌, 현관, 거실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까불어 친다. 발길이 얼마나 잰지 신기하다. 누가 저렇게 빨리 뛰라고 가르쳤을까?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한참 신나게 날치고 뛰어 돌아다니던 녀석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쪼르르 자기 살던 방으로 달려간다. “꼬마야, 왜? 거긴 뭣 하러? 아무것도 없어.” 내가 급히 뒤따른다. 자기 살던 방 문턱에 선 꼬마는 자신의 살림이 다 빠져나간 텅 빈 방을 놀라서 둘러본다. 고 작은 가슴이 철렁하는 소리가 마이크 들이댄 듯 크게 들린다. 난 안다. 내 가슴도 빈 방바닥으로 동시에 철렁하고 떨어져 내렸으니까. 꼬마는 방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주저앉아 문간에 서 있는 나를 본다. 나를 보는 꼬마의 눈…. 물기어린 검은 눈동자…. 불안에 떠는 아이의 눈…. 두려움, 외로움, 슬픔이 가득 차 너울댄다. 그런데, 그런데 그 아이의 눈 속에 왜 나 자신이 들어있는 걸까?
내 다리뼈가 없어졌는지 스르르 꺼져 내려앉는다. 꺼이꺼이 하는 괴성이 내 목에서 터져 나온다. 더 물러설 자리는 없는데 꼬마는 조금이라도 더 뒷걸음질 쳐 보려고, 도망쳐 보려고 뒷벽을 민다. 갈 데가 없다. 갈 데가 없어. 그래도 가야 해. 너 나, 다 가야 해. 그게 인생인 걸 어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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