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만남입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버클리 문학회 특강에서 서울대 명예교수, 권영민교수가 던진 첫 말문이었다. “저는 두 시인의 만남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만남이 한국문학사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겼는지 소개하겠습니다.”그는 마치 다큐영화를 틀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1939년 일제강점기, 촉망받는 시인 두 명이 문단에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잡지 ‘문장’을 통해 데뷔한 박목월과 조지훈입니다. 당대 명망 높았던 정지용 시인은 목월을 추천하며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목월이 날 만하다”고 극찬했습니다”.
권교수는 계속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두 시인이 등단한 직후, 일본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이 문을 닫고만다. ‘문장’도 곧 강제 폐간됐다. 갓 등단한 지훈과 목월도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혜화전문(동국대의 전신)을 졸업한 뒤 바로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갔고, 목월은 고향 경주에 머물며 금융조합 서기 일을 했다. 누구도 이들을 시인으로 알아주지 않던 시기였다.
글에 목말랐던 지훈은 다른 문우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1941년 봄, 그는 옛 잡지에서 찾은 주소로 목월에게 편지를 썼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던 지훈에게 뜻밖에도 목월의 답장이 닿았다.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권교수는 마치 서사시를 읽듯 만나는 순간을 묘사했다.
“1942년 이른 봄날 해질녘의 건천역. 하늘에서는 봄비가 분분히 내렸습니다. 목월은 한지에 ‘박목월’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 들고 기다렸습니다. 기차가 역 구내로 들어오자, 시골 아낙네 서넛과 촌로 두엇이 플랫폼에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내려선 사내.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밤물결처럼 출렁거리던 신사. 조지훈이었습니다. 목월은 자기 이름을 적은 한지를 어린아이처럼 높이 흔들었습니다. 두 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 안았습니다. 목월은 스물여섯, 지훈은 스물둘이었습니다.”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건천역에서 처음 만난 뒤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되었다.
둘은 폐허의 고도 경주의 여관에서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문학과 역사를 논했다. 지훈은 시인이라는 자기 존재를 귀히 여기는 목월이 고마웠고, 무엇보다 그가 발표할 수도 없는 시를 써 두고 있는 점이 믿음직했다. 목월은 지훈을 석굴암으로 안내했다. 대숲 사이로 복사꽃이 발갛게 고개를 드러낸다. 진눈깨비가 흩날려 제법 쌀쌀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찬술에 취하여 떨고 있는 지훈을 목월은 외투로 감싸 주었다.
둘은 경주의 왕릉 사이 오솔길을 걸으며 솔밭 아래 바람 소리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훈은 열흘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다. 지훈이 목월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보내왔다. 목월을 위해 정성스레 쓴 시 한 편이 덧붙여져 있었다. ‘완화삼’이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하늘은 멀어/산새가 구슬피/울음 운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저녁 노을이여//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
지훈의 편지를 받은 목월은 밤새 화답시를 준비한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이 아름다운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으로 꽃피우게 됩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한국 현대시의 정신적 좌표가 됐습니다.
건천역에서 이루어진 두 청년 시인의 소박한 만남이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꾸게 하고, “나그네”란 한국의 명시를 탄생시켰습니다.” 내가 권영민교수를 처음 만난 것이 1990년 초, 그가 버클리 대학에 초청교수로 처음 왔을 때였다. 한국일보에서 명칼럼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 이재상형, 소설가 신예선 여사, 김정수형, 김옥교시인등과 문학활동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민 후 초야에서 거의 잊혀졌던 소설가 최태응선생과 초기작품들의 발굴, 한국문학사에 재조명시키는 일을 벌였다. 또한 북가주에서 문학인들의 글을 모아 책을 내었다. 무슨 예지였을까? “해냄”사에서 1995년에 펴낸 그 책의 이름도 “서른 세사람의 만남”이었다. 그후 그는 서울대학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쳤고, 우리는 생업과 함께 북가주에서 “이민문학”을 계속해왔다.
“서른 세사람의 만남”이 나온지 꼭 20년만이다. 건천역의 역사적인 만남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우리의 만남도 태평양을 건너 거의 사반세기만에 이뤄진 셈이다. 이민자로 살면서 술익는 고향이 그리워 평생 모국어로 글을 써온 우리들에게 “나그네”는 가슴 뜨거운 우리들의 시다.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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