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에게 이번 주는 빛나는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되어 왔다. 4월로 예상되는 2016년 대선출마 공식발표를 앞두고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9일 여성권리 진전 보고서를 발표하고 10일 유엔본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캠페인 주요 테마로 알려진 ‘여성권익 보호’의 기수로 각광을 받도록 만반의 일정이 오래전부터 잡혀 있었다.
10일 힐러리는 ‘미래의 대통령’으로 소개되며 연단에 섰고 20년 전 퍼스트레이디 시절, “인권이 여성의 권리가 되고 여성의 권리가 인권이 되도록 하자”는 자신의 제언을 상기시키며 박수갈채 속에 연설을 마쳤다. 그러나 이 무대는 뒤이어 열린 짤막한 기자회견에 밀려 묻혀버렸다. 지난 열흘 동안 워싱턴 정가를 뜨겁게 달군 ‘이메일 논란’ 수습을 위해 마지못해 나온듯한 힐러리가 기자들과 마주 선 21분간이었다.
힐러리가 국무장관 재직기간 내내 관용 이메일 계정을 만들지 않은 채 자신의 개인 이메일을 공무에 사용했으며 이를 국무부 서버가 아닌 자택에 설치한 개인 서버에 저장했다는 지난주 보도로 불거진 이메일 논란은 대선후보로서의 자질과 공직자의 자세 등에 대한 의구심이 연방법 위반 여부와 맞물리면서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힐러리는 즉각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측근들이 동원해 정정 보도를 요구하고 반박기고를 싣는 정도에 그쳤을 뿐, 무시하고 업무에 충실하며 가라앉기 기다린다는 클린턴식 대응으로 일관했다.
방치한 이메일 스토리가 ‘논란’을 넘어 ‘이메일 스캔들’에서 ‘이메일게이트’로 부풀려지자 급해진 것은 민주당이었다. 연방의회를 공화당에게 내주고 2016년 백악관 사수를 벼르고 있는 민주당에게 힐러리는 현재로선 거의 유일한 대선주자인데… ‘위기의식’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설명하라는 당내 압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기자들 앞에선 힐러리는 변호사답게 조리 있는 침착한 어조로 조목조목 답변했다. 그러나 내용은 그리 명쾌하지 못했고 설득력도 약했다. 약간의 후회와 강력한 방어가 혼합된 주요내용을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왜 개인 이메일만 사용했는가? 그게 편해서. 지금 생각하니 둘 다 사용하는 편이 더 현명했을 뻔 했다. (소통 내용을 자신이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는 의심이 쉽게 사라질까?)-자택 서버를 국무부나 제3의 독립적 검사관에게 조사받게 할 것인가? 노우. 그건 사생활보호 문제다. 난 이미 공무상 이메일은 충분히 다 넘겨주었고 내 개인 이메일은 다 삭제했다. 딸 결혼식, 어머니 장례식, 요가와 가족휴가 같은 사적인 내용들이다.
-연방법 위반 아닌가? 아니다. 난 모든 규정을 충실하게 준수했다. 나의 재직시절 법과 규정은 공무에 개인 이메일 사용을 허용했다. 그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연방법 규정 여부엔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14년 연방기록법이 강화되기 전까지는 개인 이메일 사용은 합법이었고 공무 이메일을 정부서버에 저장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은 없었다. 그러나 2005년 국무부 정책에 의하면 모든 직원이 공무수행 때는 관용 이메일을 사용하도록 명시하고 있다.)-이번 논란이 당신의 대선출마 결정에 영향 미칠까? 아니다. 난 미 국민의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니까.
자의적 판단으로 이메일을 분류해 절반만 국무부로 넘기고 절반은 삭제한 후 더 이상 조사는 안 받겠다고 못 박았으니 논란이 가라앉을 리가 없다. “무조건 자길 믿으라고?” “믿기 싫으면 말라는 건가?” “다 지웠어? 왜 독립 검사관의 조사를 거부해?” “도대체 무엇을 숨기는데?” - 물 만난 고기 같은 공화당만 포문을 연 것이 아니다. 진보 미디어들도 잔뜩 날을 세우며 계속 파헤칠 기세가 역력하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시원한 해명은 못 되었다. 사실 이메일 논란 자체는 대중의 호기심을 끄는 ‘흥미진진한’ 스캔들이 못 된다. 민주당이 우려하는 것은 자칫 대선 후보자질 논란으로 확대될 가능성이다.
요즘 곳곳의 미디어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는 화두가 있다 : “힐러리의 최대 적은? 힐러리”40년 정치판에 머물러온 클린턴부부의 정치적 짐 보따리와 그 흠집들이 논란을 빚을 경우 드러날 힐러리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빗대는 말이다.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각종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주요과제를 처리할 때마다 ‘비밀주의’에 집착해온 힐러리의 과거 성향들이 계속 재조명되고 있다.
이렇게 공식출마 발표도 없이 힐러리의 2016년 대선 캠페인은 시작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관식’ 운운하던 따논 당상의 경선은 힘들게 되었다. 이미 민주당 일각에선 대안 후보 물색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표밭은 아직 견고하다. 이메일 논란이 터진 후에도 힐러리 대선후보 지지는 86%로 압도적이다.
문제는 이 절대적 지지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논란이 계속되면 신뢰가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지지율도 떨어진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모든 정보가 노출되고 있는 요즘, ‘비밀주의’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투명성’은 이 시대의 리더에겐 바람직한 덕목이 아닌 필수적 요건이다. 유권자들에게 ‘힐러리 클린턴 행정부의 투명성’을 확신시키는 것이 (출마한다면) 힐러리 캠페인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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