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사슴 한 마리 저녁노을에 서서 초점 흐린 눈망울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리고는 “내 다리에 힘 빠지기 전에는, 저 벼랑을 쏜살같이 타고 올라가 산딸기를 가지 채 꺾어 물고 단숨에 달려 내려 왔었는데...”라고 중얼거린다. 이 늙은 사슴의 모노로그(Monologue)는 어쩜 지금의 나의 독백인지 모른다.
나도 사슴의 젊었을 한 때처럼, 하룻밤 사이에 원고지 100장의 칸도 거뜬히 메운 적도 있었고 연극무대를 종횡무진으로 밟으며 연기했고, 그리고 외다리로 서서 학처럼 춤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가운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에서도 똑똑히 알아보지 못하는 시력의 약화와 지팡이에 의지한 뒤뚱뒤뚱 펭귄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걸음걸이의 불편! 내 주치의가 이 같은 현상은 컴퓨터가 아닌,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지 칸을 메워 온, 장기간에 걸친 집필생활에 의한 후유증에서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내 집필생활 60여년에 주어진 <훈장>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보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약해지지마!” “쓰러지지마!”라는 두 갈래의 <의욕의 버팀목>을 짚고 서서 지난 연말을 보내고 있을 때, 마누라가 나를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실어 보내는 웃지 못할 그야말로 쓴웃음을 자아낸 연극 한 토막이 벌어졌었다.
작년 12월, LA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손녀 ‘하나’와 외손자 ‘한솔’이가 크리스마스와 연말휴가를 얻어 올라온 김에 그들의 둘째 삼촌 집에서 중학생인 내 친손녀 ‘희연’을 포함한, 우리 가족 3대의 모임을 가졌었다.
그런데 2층에 자리 잡은 둘째 아들 ‘동현’의 콘도로 올라가기 위해 내가 가파른 계단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목 디스크 수술 이전인 4년 전만 해도 누구의 도움 없이도 거뜬히 올라갔었는데 그 밤은 내 힘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딸 ‘민아’의 부축을 받아 올라갔다. 그리고는 며느리 ‘정진’이가 끓인 맛있는 떡만두국과 둘째가 차려낸 생선요리로 밤 10시 경에 우리 가족의 단란한 모임이 끝났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관문을 나섰다. 등산로에서 오르막길 보다는 내리막이 더 위험하다고 말했듯이 나 혼자서는 가파른 계단을 밟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를 않기에, 누구의 부축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자 한솔이란 놈이 “할아버지, 제 등에 업히세요!”라며 달랑 나를 들춰 업는다.
6살 때부터 <콩쥐팥쥐> 연극에서, 군사로 시작한 그놈이 이제는 20살 중반의 190cm의 키로 자란 그의 널찍한 등짝에 고목나무 덩굴에 매미 매달리듯이 업혀 내려가면서, 나는 연신 “한솔아 조심해!”라는 말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 할애비는 살만큼 살았지만, 혹시나 발을 헛디뎌 한솔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이 할애비의 염려의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내 등 뒤에서 외손녀 하나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의 의미는 다름 아닌, 콩쥐팥쥐 연출 때마다 6•70살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운 걸음의 할아버지가 동생 등에 업혀 가고 있는 현재의 측은한 마음의 표출 바로 그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린 피로로 해서 내 몸뚱이는 창호지에 물을 뿌린 듯 탁 까불어지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단란한 둘째 놈의 집을 그리고 내가 바라는 한국 나들이가 내 발로는 쉽지 않다는 허탈감이 실타래같이 뒤엉키면서 잠 안 오는 밤이 며칠 이어져 갔다. 그래서 12월 28일 일요일 새벽 2시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수면제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그날 주일 오후 4시쯤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우리집 침실이 아닌, 병원의 병상이었다. 내 침대 맡에는 딸 민아가 앉아 있었다. 민아의 설명에 의하면 그날 아침 8시쯤에 교회 갈 준비를 위해 엄마가 아빠를 흔들어 깨워도 꼼짝도 안 할 뿐 아니라, 등짝을 떠밀어 세워도 뒤로 발랑 넘어지기에 덜컥 겁이 나서, 자기를 부르고 또 구급차를 불러 아빠를 병원에 실려 보냈다는 것이다. 할멈의 이같은 해프닝적인 처사는 처음이 아니다.
4년 전, 막내와 우리 세 식구가 비교적 장기간인 50일간의 한국 나들이에서 돌아왔을 때, 비교적 시차에 약한 내가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도 할멈이 나를 구급차에 실어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병원에서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을 굳이 병원으로 실어 보낼 필요가 없다고 일러 주었는데도 말이다.
그때마다 우리 민아는 병아리가 에미 닭의 뒤를 쫓아가듯, 내가 실려 가는 구급차 뒤를 따라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그리하여 주일 오후 5시, 6개월마다의 건강진단처럼 건강상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단서 쪽지 한 장을 들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딸의 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인 월요일, 내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으신 우리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병문안 전화가 걸려 왔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목사님의 말씀이 “권사님이 장로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나도 목사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할멈이 자주 봉홧불을 치켜드는 양치기 목동 꼴이 될까봐, 그게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오늘도 나는 저녁노을이 짙게 물든 서산마루 쪽 창가에 앉아, 집 앞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 날 비바람에 노랑 은행잎을 모두 떨구어 버리고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나목(벌거벗은 나무)의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물든 노을빛이 오늘따라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극장의 마지막 무대를 비추는 조명 색깔이 저렇게 영롱한 색깔이었으면...”하고 독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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