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옆 동네 오린다(Orinda)에 있는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초신(Chosin)을 상영 한다고 해서 이웃 김영진 교수와 함께 구경을 갔다. 미국인은 장진호를 Chosin Reservoir라고 부른다. 그것은 일본군이 만든 전투지도에 지명 장진(長津)을 일본어 독음 초신(ちょうしん)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약 25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영화관에는 상영시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관람객들이 꽉 들어찼다. 영화를 시작하기 앞서 이 행사를 주관한 지역 재향군인회 회장이 나와서 간단한 인사말을 한 다음 “여기 혹시 한국전에 참가했던 분 계십니까?” 하니까 여나뭇 명이 손을 들었다.
이어서 회장은 ‘혹시’ 이중에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분 있습니까?하고 다시 물었더니 두 사람이 또 손을 든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사람은 바로 내 앞 좌석에 앉은 분이었다. 내 앞에 앉은 그분은 영화 상영 도중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이 노인은 당시 미해병 1사단 우측 방어 부대였던 미7사단 31연대전투단 1대대 C중대 소속 중기관총 사수였는데 자기 중대원 중 생존자가 20명에 불과했다고 했다.
미해병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최선봉으로 상륙하였고, 이어 서울 탈환작전에서도 최선봉 공격부대로 서울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서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원산에 상륙한 미해병1사단은1950년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水洞)에서 첫 전투를 벌인다.
예하 7연대 1대대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부터 후퇴한 인민군 344전차대대 잔존 병력과 조우하여 이를 패주시킨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투 중 일부 중공군 포로들이 발견됨으로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그 때는 사실상 중공군 9병단의12만 병력이 장진호 부근에 매복하여 미군병력이 포위망 안에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은 미해병1사단의 우측 미7보병사단 31연대전투단 약 4500병력에게 공격을 시작했다.
장진호 동쪽에 산재해 있었던 연대 산하 3개 대대는 유무선 통신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아서 중공군과 제각기 고립된채 맞서야 했으며, 인접 해병대와 협조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대장이 전사하고 부연대장 마져 전사할 정도로 타격을 입고 약 1,000명만 살아 남아서 하갈우리의 해병대와 합류하였다.
장진호 서쪽으로 진주했던 5연대와 7연대 역시 중공군 4개사단에게 포위된채 고립되어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장진호 서쪽 160km 지점에는 미8군단 보병 제2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미군 중에서도 최정예인 미해병1사단을 포위 섬멸할 경우 미국 국민들이 입게될 심리적 충격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은 해병사단을 포위한 후부터 선전매체를 통해서 “미 해병사단의 섬멸은 시간문제다”라고 계속 선전하고 있었고, 미국 언론도 미 해병사단의 철수 과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장진호 전투가 단순한 1개 사단의 철수작전이 아니라 미-중 양국의 자존심 대결이 되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미해병대1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거의 항명이다 싶을 정도로 진격 속도를 늦추어 가며 진지를 구축하고 탄약 및 보급품을 저장했었기 때문에 사단이 겹겹 포위된 가운데에서도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욱이 하갈우리에 만든 야전활주로가 부분적이나마 개통이 됨으로 기사회생의 숨통이 트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야전활주로를 통해 시신 173구와 함께 부상자 4,312명이 후송되었으며 탄약과 보급품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미해병1사단은 과감한 돌파작전으로 아군의 근접 항공지원을 받아가면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하였다. 당시 아군에게 무서운 적은 중공군이라기 보다도 극심한 추위 그 자체였다.
우리가 본 기록영화 초신에서도 미군은 중공군과 싸운 것 보다 추위와 싸운 것에 더 초점을 둔것 같았다. 날씨가 너무나 추워서 부상자는 잠깐만 밖에 방치하여도 동사하였고, 기관총은 불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목표가 있건 없건 주기적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공중에서 투여되는 보급품도 얼은 땅에 부딪혀 깨지는 바람에 탄약의 경우 25%만 사용 가능했단다. 차량도 일정간격으로 가동을 시켜주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도 두껍게 얼어있어서 참호를 파거나 축성을 하는 일은 극심한 노동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동상 방지였는데 전투나 작업후에 땀을 흘리고 양말을 갈아신지 않으면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영화가 끝난 다음 나는 내 자리 바로 앞에 앉았던 장진호 전투 참전 노병 앞에 서서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당시 이분들은 Korea라는 나라가 지구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홍안의 소년들이였을 것이다.
우리 한반도가 공산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우리 조국이 지금 이처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분들이 와서 피흘려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어디 거저 얻을 수 있다더냐? The freedom is not free. 요즘 젊은이들이 확실하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전사가(戰史家)들은 당시 미해병대가 장진호 전투에서 무너졌다면 아마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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