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연말 수필가 등단까지
▶ “하나에 빠지면 미쳐서 살죠”
수필가로 한국 문단에 등단한 이병응씨가 등단 기념패를 자랑하며 문학인이 된 기쁨을 전하고 있다.
[화제의 인물 - 미 최대 화분회사 ‘리스 파터리’ 이병응 회장]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무한하고 위대한가를 알려면 이병응(William Lee·75) 회장을 보면 된다. 40여년 전 미국에 와서 맨손으로 미국 최대의 화분회사 ‘리스 파터리’(Lee’s Pottery)를 세운 그는 은퇴하면서 곧바로 평생 소원이었던 예술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족적이 경이롭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처음에 그는 사진작가가 되어 찾아왔다. 홍익대 미대 출신인 그는 사업가로 사는 동안 묻어두었던 창작에의 열망을 카메라를 통해 분출하기 시작했다며 그렇게 만든 작품들을 가지고 생애 첫 개인전을 연다며 어린아이처럼 흥분된 표정으로 인터뷰했었다. 그때가 2012년 3월이다.
그로부터 1년 후, 2013년 5월에 이 회장을 다시 한 번 인터뷰했다. 그때는 추상화가와 조각가가 되어 있었다. 사진전 이후 새로운 창작의 세계에 몰입한 그는 그 짧은 동안 놀랍게도 100여점의 유화 대작과 수십 점의 조각품을 완성하고 또 다시 개인전을 연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래키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 연말이던 2014년 12월, 이 회장을 세 번째로 만났다. 이번에는 글 쓰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내 도자기 인생을 돌아보며’란 수필로 한국의 문예지 ‘수필춘추’을 통해 등단한 소식을 전한 그는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입을 열었다.
“원래 글을 잘 쓰고 많이 썼습니다. 수송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대회에서 1등을 하곤 했지요. 그때 썼던 글을 아직도 몇 줄 외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남한테서 인정 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수필춘추 2014 겨울호에 소개된 이병응 회장의 글에 대해 심사위원들(이유식 이현복 정기용)은 “지난 인생의 흔적을 진실하고 담백하게 토해낸 이 수필은 이 시간까지 살아 왔던 갖가지 상념, 과거의 회상, 현재적 상황과 미래적 상상, 이런 것들이 잔잔하면서도 무리 없이 엮어나간 작품”이라며 “이런 솜씨는 그동안 익혀온 문장력 수련의 결과”라고 호평했다.
평소 동문회 홈페이지에 글을 자주 올리는 등 글쓰기가 생활화돼 있다는 이 회장은 “그렇게 잘 쓰는데 왜 그러고 있느냐”는 친구들의 많은 독려가 수필가로 데뷔한 계기가 됐다고 전한다.
“글 쓰는 게 굉장히 즐겁습니다. 살아온 세월과 연륜이 쌓여서인지 많이 나와요. 글이라는 게 자기 마음을 옮기는 건데 이민 와서 고생도 많이 하고, 사업도 크게 하고 하면서 내면세계가 풍부해진 듯합니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평생 지속돼 온 도자기 인생이 그의 글의 원천이다. 실제의 한국 고향산천은 모두 없어져버렸다는 그는 “사대부고 친구들이 내 고향”이라며 항상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동문회 홈페이지에 올리곤 했던 것이 문학적 토양을 쌓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또한 2007년 이 회장이 ‘자랑스러운 홍익인’으로 선정됐을 때 동문회보에 실렸던 그의 입지전적 스토리가 수많은 후배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동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은퇴 후에 사진, 추상화, 사실화, 조각을 거쳐 이제는 문학입니다. 지금도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하지만 문학이 가장 권위 있다고 생각해요. 인생을 수학적으로 살기보다 예술적으로 살면 화려한 예술세계의 꿈이 한없이 펼쳐지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몰두했고, 그림을 그렸을 때는 그림만이 자신의 세상이라고 말했었다. 사진전 때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사진만 생각하고, 한국으로 미국으로 사진 찍으러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고, 한 장면 찍으려고 밤을 새웠다”고 했다. “한마디로 미친 거나 마찬가지”라며 “과장 좀 섞어 말하면, 도둑이 다 집어가도 사진기만 있으면 살 것 같다”고도 했었다.
유화를 그리던 시기의 인터뷰에서는 “지난 1년 동안 매일 눈 뜨면 그림만 그렸고, 손자 왔을 때 외에는 스튜디오 밖을 나가지 않았다”며 “그림 때문에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다보면 창밖에 먼동 터오는 날이 많았고, 체중이 많이 줄어 의사에게 경고를 받았다”면서 “아내가 다려주는 홍삼을 먹으며 힘을 비축하고 모든 에너지는 그림을 위해서만 쓴다”고도 말했었다.
그랬던 이 회장이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마치 무당 신들린 것 같아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글을 쓰면 구름 타고, 무지개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낍니다. 나만의 환상 속에서 정말 행복합니다”
그런 열정과 집중, 집념과 희열이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완전히 매스터하여 작가의 경지에 오르는 성공의 열쇠인 듯하다. 이병응 회장이 다음에 또 어떤 예술인이 돼서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정숙희 기자>
☞이병응씨는
홍익대 미대 도예과 제1회 졸업생으로 1964~70년 수차례 국전에 입선하고 상공미전에 특선(국무총리상)했다. 71년 도미 후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1973년 Lee’s Pottery Inc.를 설립했다. 서구적 디자인에 한국적 정서가 깃든 그의 작품은 미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월마트와 홈디포, 타겟 등 대형 체인스토어에 납품하는 미국 최대의 화분제조기업으로 성장했다. 홍대 동문회 상임고문 겸 이사장이며, 사대부고 동문회 회장과 이사장, 장학재단 이사장을 거쳐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회장은 ‘자랑스러운 한인교포들’(1997)과‘미국을 빛낸 한국인들’(2001) 책자에 수록됐고, 한인 역사박물관 주관‘미주이민 100년 기념 한인 인명록’(2011)에 선정됐으며, LA 시의회로부터 감사장(2011)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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