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뒤뜰 조팝나무가 밥풀 같은 꽃들을 달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님의 지병이 깊어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화였다. 남편은 급하게 사업상의 일들을 마무리하러 다녔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다시 전화를 받았다. 별안간 어머님이 의식을 잃으셨다는 전화였다. 바로 전날 밤만 해도 바쁜 일 끝내놓고 다음 달에 오지 그러느냐고 하신 분이 의식의 끈을 놓으셨다는 말에 남편은 공항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머님은 남편이 인천공항에 내려 병원 근처인 삼성역을 지나는 시점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만나지 못하시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미국은 막 동이 트고 있는 시각이었다. 아들은 아직 따뜻하게 남아 있는 어머님의 체온을 안고 아픈 이별을 해야 했다. 아프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으랴마는 임종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은 남편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버릴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시각,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간 나는 영정사진으로 어머님을 만나야 했다. 호텔식 복도가 있는 낮선 장례식장의 안내판에서 옅은 미소를 띤 어머님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의 황망함을 잊을 수가 없다. 열다섯 달만의 해후였다. 지난해 구정을 쇠러 갔다 올 때 끼고 계시던 반지를 빼주시며 작별인사에 눈물을 보이시더니,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의식이 들 때마다 아들 며느리의 이름과 아이들 이름을 차례로 부르셨다는 간병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리 흐느껴 울어보아도 어머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머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평소 좋아하시던 꽃들을 골라 영정사진의 둘레를 장식하고 가장 좋아 보이는 수의를 한 벌 고르고, 지칠 때까지 울고 또 울어보는 일뿐이었다. 어느 자식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식이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곤 때늦은 후회와 때늦은 눈물이 전부였다.
짧은 이별의 절차를 밟아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사시던 아파트의 문을 열었을 때 다시 한 번 느껴야 했던 어머님의 부재감은 혹독했다. 거짓말처럼 온기를 잃은 어머님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아침을 맞는 일은 허망했다. 부동산에 아파트를 내놓고 낮선 이들의 방문과 맞닥뜨리며 어머님의 손때가 묻은 살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롱에서부터 바늘쌈지 하나에 이르기까지 손끝에서 떠나가는 물건들 하나마다 아픈 망설임이 뒤따랐다. 이국에 사는 우리들이 가져올 수 있는 물건들은 많지 않았다. 거실에 오래 걸려 있었던 동양화 몇 점과 장롱 속 오래된 사진들과 돋보기, 스카프나 커피 잔같이 자잘하면서도 어머님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소품들을 위주로 가방을 꾸렸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뒤뜰의 조팝나무 꽃들이 모조리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나는 짐도 풀지 않은 채 멍하니 조팝나무를 바라보았다. 이 집을 사던 해에 어머님이 사주신 나무였다. 묘목원에서 막 연보랏빛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나무를 보시고 첫눈에 반하신 어머님은 이건 내가 사 주마, 하시고 주방에서 잘 바라보이는 곳에 손수 자리를 잡아주셨다. 그리고 내가 없더라도 꽃이 피면 나를 본 듯 보거라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어머님과 나는 아주 많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어머님은 서울에서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님은 진밥을 나는 고두밥을, 어머님은 육식을 나는 채식을 좋아했다. 어머님이 코발트블루같이 찬 색깔을 고르시면 나는 핑크처럼 따뜻한 색깔로 눈이 갔다. 어머님은 세련되셨으나 나는 촌스러웠고 어머님은 대범하셨으나 나는 소심했다. 장안의 미인이셨던 어머님 앞에 수수하기만 했던 며느리의 등장은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은 곁을 내주지 않으셨다. 열아홉에 낳아 금촉같이 키운 아들을 선뜻 내어주기엔 어머님의 나이가 너무 성성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어머님과 고부의 연을 맺은 지 올해로 스물아홉 해째, 그간 어머님은 조금씩 곁을 내어주셨고 나는 조촘조촘 그 자리로 들어갔었다. 이제는 한국에 가도 친정보다 시댁이 편안하고 친구 같은 어머님 곁에 아무렇게나 길게 누워 깊은 잠을 자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머님은 그렇게 훌쩍 내 곁을 떠나버리셨다. 남편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온전한 응원군을 잃었고 나는 인생의 조언자이자 각별한 친구 하나를 잃은 셈이다.
며칠 전, 온도가 급강하하던 새벽에 출근을 위해 옷장 문을 열고 외투를 찾던 중 감청색 코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겨울 마지막 외출에 입으셨던 기억이 못내 아쉬워 챙겨왔던 어머님의 외투였다. 품이 좀 크기는 했지만 따뜻해 보이는 그 외투를 입고 출근을 했다. 저녁 퇴근길에 무심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양모장갑 한 켤레와 손수건 한 장이었다. 사는 게 바빠 제대로 된 장갑 하나 없이 사는 며느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아 그렁거리며 눈물이 차올랐다.
세숫비누로 곱게 빨아 화장대 서랍에 넣어둔 손수건은 어머님이 내게 남긴 한 통의 편지일지도 모른다. 못 다하신 이야기를 한 땀 한 땀 보랏빛 작은 꽃잎 위에 새겨 넣은 편지일지도 모른다. 내게도 며느리가 생기고 사위가 생길 때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하네요, 상의하고 싶어져 나는 다시 서랍을 열어볼 것이다. 그러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화답해 주시지 않을까.
남편은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혼자서 와인을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님이 떠나시고 맞는 첫 겨울, 그의 가슴에는 많은 그리움과 후회가 살얼음처럼 얼어붙곤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남은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치러야 하는, 마땅한 형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부쩍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은 초로의 남편, 나도 그 곁에서 시력이 희미해지며 늙어가고 있다.
진눈개비가 내리는 겨울 저녁, 어머님이 쓰시던 밥사발에 밥을 퍼 저녁밥을 먹는다. 어머님이 쓰시던 돋보기를 쓰고 앉아 어머님이 읽으시던 성경을 읽는다. 서랍 속에서 어머님이 쓰시던 손톱깎이를 꺼내 손톱을 잘라본다. 넌 손톱이 참 예쁘기도 하구나, 어머님의 첫 칭찬을 듣던 그날이 생각나 가만히 내 손톱을 들여다본다. 뒤뜰에는 그칠 줄 모르는 진눈개비가 하얗게 날리고 있고 더러 조팝나무 밑으로 떨어진 눈송이들이 글썽거리며 땅으로 녹아들고 있다.
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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