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떠나가는 님을 잡아 두고픈 한 여인의 애절한 가슴을 읊은 옛 시조. /울며 잡은 소매/떨치고 가지 마오/초원 장재에/해 다 저물었소/란 이 시조의 초장(첫머리)은 어쩌면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보내는 우리들의 애틋한 마음의 표출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더더욱 2014년이란 이 해는 나를 19년 만에 다시 교과서 수록작가로 만들어 준 해이기에 더욱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해인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은 가는 것! 이 해가 가면 내 나이는 여든 여섯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땅 한국에서 이 땅 미국으로 옮아와 산 지도 벌써 39년째로 접어든다.
하지만 철들어 산 세월로 치면, 이 땅에서 산 세월이, 저 땅에서 산 세월의 갑절이니 서글픈 일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나의 전공분야가 아닌 활동이 있었다면 그건 수필집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26년에 걸쳐 4백편이 넘는 수필을 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글의 문패라고도 할 수 있는 제목을 달면서 <추억의 사진 한 장>같은, 과거로의 회기의 제목 아니면, 고향의 소리인 <뱃고동 소리>라든가, 계절을 노래한 <석류의 계절>같은 서정적인 제목을 붙여 왔었다. 그런데 이번 글에는, 호두껍질같이 딱딱한 <가계부>란 제목을 부쳤다.
그 까닭은 연말이면 장사꾼들이 한 해의 매상 장부를 들춰보듯, 나도 지난 20년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온 네 권의 가계부를 꺼내어 책장을 넘겨보며 붙여 본 제목이다.
그런데 가정살림에는 무관심했던 옛 선비나, 오늘날의 작가들에 관한 뒷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 중에도 글공부에만 매달린 한 선비의 아내가 그의 긴 머리를 잘라 달비로 만들어 판 돈으로 시아버지의 생신잔치 상을 차려 드린 이야기라든가,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인 6•70년대에 흔히 있었던 일로 한 작가가 잡지사에서 원고료를 받는 날이면 그 낌새를 용케도 알아챈 동료작가 몇이 출판사 근처 다방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가 원고료 탄 친구를 꼬여 막걸리 집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는 그 원고료를 막걸리 잔에 쏟아 마셔 버린다. 그리고는 빈 봉투만 들고 곤드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와 아빠 오기를 제비 새끼같이 기다리던 아이들의 참담한 심정!그와는 달리 살아생전에 호주머니 속에 돈 한푼 넣고 다닌 적이 없었던 시인 천상병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시 <귀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란 시구를 남겨 화제의 시인이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집사람이 허구한 날 나에게 던지는 똑같은 대사가 있다면 그건 그의 뒷바라지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당신이 있었겠냐는 거다. 그 말 속에는 내가 아동극 개척이란 일에 매달려 집안살림을 등한시했다는 점과, 나의 아동극 운동에 그의 힘도 컸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맞는 말이다. 집사람의 말대로 나는 아동극협회가 치루는 해마다의 아동극경연대회와 아동극강습회 그리고 아동극단 <새들>의 국내공연과 해외공연에다, 아동극 작품집필에 매달리면서 집안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뿐인가 집사람마저도 협회와 <새들>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빚 얻으러 다니는 게 그의 일과 중의 하나였으니 집안살림은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였기에 <가계부>를 쓸 겨를도 없었고 또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윗돌 뽑아 아랫돌 받치기 식의 운영방법은 한국적인 문화풍토, 특히 특수분야인 아동극 바탕에서는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끝내는 1976년 12월, 길다면 긴 15년간의 한국에서의 아동극 운동의 막을 내리고 마누라에게 등 떠밀려 이민길에 오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돌봄에서라고나 할까, 운이 따랐다고나 할까, 미국 땅에서의 정착은 의외로 순조로웠을 뿐 아니라 빨랐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발을 디딘 지 17개월 만에, 우리는 쿠퍼티노(Cupertiono)에 있는, 전자회사 애플(Apple)과는 불과 6분 거리에 위치한 문 닫기 직전의 아랍인 경영의 미국 식품가게를 헐값으로 인수했다. 가게를 인수한 후, 집사람과 나는 기왕에 잘 살아 보기위해 온 이민길이니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각오로 가게를 리모델링(Remodeling)하고 진열대에 물건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밤낮으로 정성을 쏟아 부었다. 한편 고등학생이었던 아들 둘의 방과 후의 도움 또한 인건비를 줄이는 데 큰 몫을 하기도 했다. 가게 매상은 날이 다르게 치솟아 갔다. 그래서 가게를 인수한 지 1년 만에 가게와 애플(Apple) 중간지점에다 내 집을 마련했다. 제법 넓었던 우리 집은 문인들의 모임장소로 또 연극연습장으로 활용했을 뿐 아니라, 가게 수입의 일부가 집사람 몰래 연극제작비 일부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가게를 인수한 지 19년, 집을 산 지 20년 만에 둘 다 처분하고는 캠벨(Campbell)에 있는 지금의 집으로 옮아와 산 지가 18년이 된다. 그 날부터 나는 한국에서는 엄두도 내보지 못했던 우리 가족의 미국생활의 전부이자, 그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 가계부를 적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가 몇 권의 가계부를 더 적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남기고 가는 이 가계부는 내 작품이 수록된 교과서와 또 내가 펴낸 수많은 저서와 함께 내가 살다 간 또 다른 발자취로 남을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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