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미술의 토대 정립
▶ "요즘 그림은 철학 없어” 질타
■ 내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갖는 김병기 선생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똑같은 그림 그린 적 없어]
한 사람 안에 이렇게나 많은 것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고 신비하다. 신은 어떤 선택된 사람을 오랫동안 준비시켜 우리가 달리는 알 수 없었던 사실,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볼 수 없는 그림을 보게 해주는 은총을 베푼다. 올해 98세의 화가 김병기 선생은 21세기 한국 미술계가 선사받은 신의 선물, 오늘의 우리에게 미술이 무엇인가를 전 생애로 증언하는 전방위 아티스트다.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세월 동안 격변하는 미술사조의 한복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작가, 그 진화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 본질을 체화함으로써 그의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켜켜이 축적해온 김병기 화백은 신문 인터뷰 한 장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이요, 내가 만난 가장 도전이 되는 인터뷰이(interviewee)다. 3년반 전에도 그를 소개하는 통판 기사를 쓰면서 몇날 며칠을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거짓말 좀 보태서 몇달 동안이나 마음에 부담을 가졌던 것은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전시회,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초대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최초일 것이고, 유일한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98세의 나이에 현역 작가로서 국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질 수 있겠는가.
12월2일부터 내년 3월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김병기: 감각의 분할’은 김 화백이 지난 60여년간 그린 유화 100여점과 드로잉 30여점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회고전이다. LA에서 그린 최근작 15점을 빼고는 모두 뮤지엄, 갤러리,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대작들을 어렵사리 한데 모은 기획전으로, 한국 화단의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올해는 나에게 역사적인 해입니다. 49세 되던 1965년 미국에 와서 올해로 꼭 49년을 살았네요. 그러나 그보다 더 역사적인 일은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전시를 열게 된 것입니다. 감사하지요. 미국 시민인데도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청해 줘서 감사하고, 90이 지나면 누구도 작품을 하기 힘든데 나는 아직도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아니 그때보다 더 힘 있는 그림,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랄 정도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놀라운 기억력, 왕성한 창작에의 열정을 가진 김병기 화백은 역사에 남을 기록을 수없이 가진 인물이다. 북한과 남한에서 ‘초대’가 붙은 장이란 것은 다 해본 사람, 이론이 없던 전후 한국에서 예술론과 미술평론을 정립한 학자, 경기여고 이화여고 서울예고 서울대 미대에서 가르친 최초의 미술교사, 한국미술협회 이사장부터 시작해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한국관 커미셔너로 참가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던 한국 최초의 기록을 모두 그가 갖고 있다.
이중섭, 김환기, 이상과 가깝게 교류했던 친구요 동시대 예술가로서 그가 전한 이야기들은 지금은 신화가 됐을 정도로 수많은 매체에서 회자되면서 또 다른 신화를 낳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뒤늦게 그의 존재를 찾아낸 한국의 미술계는 요란하게 호들갑이어서 지난 몇년 신문, 잡지, 방송에 나온 인터뷰가 헤아릴 수 없고 특히 회고전을 앞둔 요즘은 온 군데서 날아와 인터뷰다, 다큐멘터리다, 책을 낸다, 야단들이다. 이 모든 것이 김 화백의 사진처럼 명료한 기억력, 단 한 글자 숫자 한 개도 틀리지 않고 구술해내는 경이로운 정신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주 로스펠리츠의 자택에서 마주한 선생은 하지만 자신의 ‘껍데기’를 소개하는 글 말고 예술가로서의 본질, 자신의 미술을 이해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최고 최초, 그런 아우트라인 말고 “하나의 인간이고 예술가로서 언제나 오늘의 문제를 생각하는 실존주의자 김병기를 알려 달라”는 부탁이다.
“나는 끝까지 달리는 장거리 선수에요.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길, 그 길의 끝까지 가는 도상에 있는 화가, 누구보다 많이 보고 잘 그릴 수 있는 화가입니다, 이중섭이는 40에 죽었으니 내 절반도 못 살았어요. 김환기도 얼마 못 살았고… 지금 와서 보니 작품들이 어리네. 난 더 성숙한 그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보입니다. 좋은 선과 좋은 그림이. 이제부터 정말 좋은 그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론과 테크닉을 겸비한 화가 김병기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추상미술이다. 초현실주의에 끌려 비형상의 끝까지 갔다가 미국에 온 후 다시 형상을 찾기 시작했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로 자연과 사람을 찾기 시작한 그의 작품에는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정신과 물질, 전통과 현재 등 모든 상반된 힘들이 조화와 긴장을 이루며 공존한다.
“내 그림은 어떤 주의와도 상관없어요. 평생 섭렵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는 종합주의 혹은 절충주의라 할까. 현대미술의 정점에서 나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어떤 룰에서도 자유하고 싶으니까. 늘 새로운 것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의 작품이 놀랍도록 젊고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것은 이처럼 환하게 빛나는 영혼 때문이다. 김화백과 마주 앉으면 100년 서양미술의 역사, 그 형식과 내용과 본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흘러나온다. 초현실주의부터 다다이즘, 큐비즘, 엥포르멜, 추상표현주의의 사조들이 우리처럼 책에서 읽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화가로서 직접 보고 겪고 체화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라 그 자체로 역사요 예술이며 정신이다.
김화백은 이번 회고전에 나오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고 강조했다. “30년 동안 같은 걸 그리는 유명화가도 있지만 나는 한 장도 같은 걸 그린 게 없어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른 날이듯 실존에 입각한 그림이란 점을 봐주길 바랍니다”
“리얼리티가 없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며 현대미술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도 쏟아내는 그는 “현대미술은 철학의 시녀 노릇을 하고 있다. 정신을 담는 것이 형식인데, 현대미술은 양식만 있지 정신이 빠져 있다. 커머셜리즘이 들어와 팔리는 그림만 그리는 것이 100년 현대미술이다”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오는 27일 한국으로 떠나는 김 화백은 전시 오프닝 전후의 분주한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고, 다시 LA로 돌아와 열심히 그리게 될 시간을 고대하고 있다.
“그림은 추구하는 과정이지 완성이 없어요.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나도 몰라. 기본적으로 나는 크리스천이니까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 무엇이냐, 그걸 추구하는 거지. 캘리포니아 남가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한인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곳이죠. 여기서 세상을 생각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사세요”
● 김병기 선생은
1916년 평양 출신. 아버지가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 김찬영이다. 1933년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하고 동경문화학원 미술부를 졸업한 김병기는 한국전쟁 발발 전 월남하여 화가, 비평가, 교육가, 행정가로서 한국 현대미술의 토대를 정립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서울대 미대교수와 서울예고 미술과장을 지냈고 북조선미술동맹의 서기장, 국방부 종군화가단 부단장,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을 지냈으며 1965년 상파울루 국제미술제에 참석했다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했다.
“한국에 있으면 감투나 쓰고 비평가로 글을 써야 했는데 글 안 쓰고 작품에 매진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는 그는 덕분에 한국서는 한동안 잊혀진 존재가 됐다. 1966 뉴욕 스키드모어 칼리지 방문교수, 1978 엠파이어스테이트 칼리지 교수 등을 거쳐 86년 가나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한국 떠난지 22년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2006년 40여년간 살았던 미 동부를 떠나 아들 가족이 있는 LA로 거처를 옮겨 캘리포니아의 태양과 자연에 매료된 작업을 하고 있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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