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 11월! 이때면 기러기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무리 지어 어디론가 날아간다. 기러기들이 사라져 간 그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섰던 그 파란 하늘을 나는 지금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낙엽 타는 연기가 아침안개 같이 산마을에 깔리면, 가을은 이미 시골 5일장의 파장(마지막 장날)처럼 허허로이 막이 내려간다.
낙엽 타는 냄새를 새삼 코끝으로 느끼는 계절이면 이브몽땅이 부른 가을노래 ‘고엽(The Fallen Leaves)’가 새삼 떠오른다. /오! 기억해 주기 바라오/우리의 행복했던 나날들을/그 시절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고/태양은 더 뜨겁게 우리를 비추었다오/무수한 고엽이 나뒹굴고 있다오/당신이 알고 있듯이 나도 알고 있다오/추억도 그리움도 그 고엽과 같다는 것을/북풍은 그 고엽마저/차가운 망각의 밤으로 쓸어가 버린다오/ 가사에서 보듯이 파리쟝느들이 느낀 가을에 대한 정서가 어찌 그들만의 느낌이었을까?
이는 사랑했던 연인을 보내듯 가을을 보내는 우수(쓸쓸함)의 공통적인 표현이 아니었던가?!오늘도 나는 가을이 가는 길목에 서서 흘러간 그 시절, 기러기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버린 그 파란 하늘을 바라보던 그쪽 하늘을 바라보지만 오늘따라 그 하늘이 먼 하늘로 너무도 먼 하늘로 비켜나 보임은 무슨 까닭일까?
그건 장기간에 걸친 원고쓰기로 인한 내 시력약화와 디스크로 인한 거동불편으로 지난 달 10월에 한국 갔다 오려던 내 계획이 허사가 되어 버린 허전함에서란 걸 나는 잘 알고 있다!그래서 나는 내 발로 걸어서 한국 갈 욕심과 지팡이 내던지고 연극할 꿍꿍이 생각으로 지난 7월에 디스크 수술의에게 재수술을 요구했었다.
그러자 일단 MRI 검사부터 해보자는 그의 말대로 나는 인간도크를 거쳐 나왔다. 촬영필름을 검토한 수술의가 내린 결론은 재수술의 필요성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그가 덧붙인 “자동차도 10만 마일 이상 주행하면 고장 났을 때 아무리 새 부속품을 갈아 끼어도 새 차가 될 수 없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면 고물차 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새삼 머리에 떠오른다.
나의 한국 가는 계획의 무산과는 달리 내가 떠나려던 지난 달, 모처럼 한국 나들이 출발 하루 전날 딸 민아가 출발인사 하러 집에 들렀다. 현관문에 들어선 민아는 낭랑한 목소리로 “엄마 나 왔어요.”라고 엄마를 찾았다. 민아의 목소리를 듣고 글 쓰는 방에서 나온 나에게 민아는 “아빠, 잘 다녀올게요.”라고 말하면서 식탁 의자에 가 앉는다.
나도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잘 다녀오라는 말은 제쳐놓고, 지난날 내가 연극 ‘효녀심청’에서 심봉사를 연기했듯이, 딸애를 향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는 두 손까지 휘저으며 슬프게 “청아 청아, 이 눈먼 애비를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라고 대사를 읊어대자, 옆에 있던 할멈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청승 그만 떠소! 모처럼 한국 나가는 애 앞에서 무슨 꼴이요?”라며 나를 나무란다.
그러나 민아는 제 에미의 만류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아버님, 이 청이가 어디 인당수 깊은 물에 빠져 죽으러 가기라도 한다고 이러시나이까?”라고, 내 연극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대사를 읊어대자, 제 에미가 “쯔쯔 잘들 놀고 계시네, 굿쟁이 애비에 굿쟁이 딸이 아니라 할까봐서, 청승들 떨고 있네, 제발 그만들 하소 잉!”이라고 브레이크를 거는 통에 민아와 나의 연극은 한바탕 웃음으로 막이 내려졌지만, 민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아버진 욕심이 너무 많으셔, 아빠는 3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을 옆집 드나들듯이 하시고는 7년 만에 한국 나들이 하려는 저에게...”였다. 민아의 말이 맞다! 디스크 수술 전인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1년이 멀다하고 한국을 드나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모처럼 한국 갔다 오려는 딸애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다니 그야말로 나는 나쁜 애비인지 모른다.
우리 셋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하나 아빠(사위)가 사무실 일을 마무리 해 놓고 출발인사 하러 집에 들렀다가 돌아갔다. 나는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서 있었다.
딸이란 출가외인이라지만 어디 그런가. 시집간 딸이 재정적으로 못 살기나 한다면, 제 자신이 못 사는 것보다 더 가슴 아파하는 게 부모의 정서(정)가 아닌가? 그런데 사위와 민아는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기반을 닦아 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 방문에 이어 사위의 고교 동창 두 커플과 어울리어 중국 ‘상하이’까지 다녀온다니, 이 얼마나 부모를 흐뭇하게 하는 일인가?
그리하여 그 다음날, 내 날개 죽지에 힘이 모자라 날아가지 못하는 그 하늘을 향해 사위와 딸애는 겨울을 나기 위해 늦가을의 하늘을 무리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그들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재충전을 위해 내가 날아가려던 그 하늘을 향해 짝을 지어 힘찬 날개짓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애비는 가을이 가는 길목에 서서 그들이 날아가고 있는 그쪽 하늘을 그저 흐뭇한 가슴으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세월의 빠름을 실감나게 하듯, 그들은 23일간의 여정을 즐겁게 마치고 돌아와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하듯, 그들의 둥지에 사뿐히 내려앉아 새로운 삶의 나래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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