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둘째로 태어났다는 것은‘낙동강 오리알’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렇게 축복받은 운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란 대체로 첫째 아이에 관심이 많기 마련이고 사랑은 막내들에게, 둘째는 그저 가운데 끼어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성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소위 낀세대(샌드위치) 운명을 타고난 둘째들은 옷도 형이 입다 남은 옷을 물려 받아야 되고 참고서니 뭐니 그런 기타 찌꺼기들도 물려받아 써야하는 더러운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인격 형성도 확실한 자기 주관보다는 형을 닮아가는… 판박이 운명을 대체로 벗어날 수 없다.
형이 쓰는 말투나 행동… 그리고 습관이나 배움(교육)의 과정에 있어서조차 형의 영향력을 결코 피해가기 힘들다. 그래서 ‘형만한 동생없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의 모든 행동… 가치관 등은 부모님보다는 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편이었다. 우리 형은 소위 뺑뺑이 세대… 즉 중,고교를 추첨제로 입학하는 행운(?)을 맛보지 못한 마지막 세대로서, 자나께나 입학시험에 시달렸던 학돌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직 코흘리개 나이에 이미 중학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방과 후에도 과외공부를 해야하는, 첫째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행운을 누리지 못한 형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압력은 늘 거셌고, 한창 나이에 뛰어놀고 싶은 욕망은 주체하기 힘들지… 우리 집은 늘 형과 아버지 사이의 기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어려운 한자들을 척척외고,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지식이라든가 하다 못해 6학년 음악책의 박자와 음표… 조선왕조의 순서는 물론이거니와 24절기까지 몽땅 외우고 다녔다. 244 4844… 태정태세문단세… 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고구…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듣게 되는 것이 중간고산지 뭔지 시험을 앞둔 형의 음표 외는 소리와 24절기를 동요가락에 맞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오곤했다.
자라면서 소위 낀세대… 첫 째도 막내도 아닌, 그저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대충 자랐다는 그런 섭섭함 속에서도 한가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물론 얻어터진 적도 많았지만) 알게 모르게 받아 온 형의 사랑이다. 가장 감사했던 것은 우표를 모으던 시절, 형이 자신의 친구 집에서 (형의 표현을 빌리면)쎄벼다 준 진귀한 우표들이다. 무슨 아라비안 우표… 유럽의 어느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우표들을 왕창 훔쳐다 줬을 때 나는 감격해서 거의 울뻔했다.
다음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 형 때문에 외우게 된 24절기(를 가사로 한) 동요이다. 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고구…입하소만망종하지…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동요인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어떤 계절을 노래한 곡으로 기억한다. 형은 아마도 시험이 끝난 직후 (지긋지긋해서라도)머릿 속에서 지워버렸겠지만 형의 노래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동요는 평생에 걸쳐 휘파람과 함께 되뇌이며, 계절이 바뀔때 마다 그 사계를 노래하곤 한다.
작곡가 비발디(1678-1744)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의 대표작이 四季인 것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비발디는 알다시피 평생을 고아원에서 지내며 고아들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며 일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원래는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천식 때문에 신부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일평생을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다 갔다.
계절이 오고 계절이 가는 소리… 그것은 단순히 비가 오고… 눈이오고… 그런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그 가슴 속에 찾아오는 반가움과 희망… 그리고 또 계절의 소리와 함께 떠나가는, 이별이요 그리움이기도 할 것이다. 비발디는 고아원의 어린 학생들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도록, 곡을 쉽게 작곡했기에 누구나 담박 이해할 수 있는 곡이 四季이기도 하다. 밝고 명랑한 봄의 1악장… 눈오는 계절의 서정, 겨울의 2악장… 추수의 계절, 가을이 오는 소리… 실록이 짙어가는 한여름의 열기… 비발디의 사계를 듣고 있으면 티없이 맑게 뛰놀던 시절… 24절기를 노래하던 때가 떠오르곤 한다.
24절기는 태양의 운동에 근거, 계절의 변화를 알기위해 중국 주나라때 만들어진 것이다. 입춘 우수 경칩…하고 노래하고 있으면 어느덧 계절이 오고, 계절이 가는 소리… 먼 산의 뻐꾸기의 울림… 그리고 백로추분한로… 가을을 노래하는 부분에선 어린 나이임에도 ‘가을이 왔구나’하는 감상으로 가슴 한 쪽이 서늘해지곤 했다. 누구나 계절에 대한 감상은 있겠지만, 농경민족이었던 한민족만큼 입추로 시작하여 처서, 백로…로 이어지는… 가을이 온다는 그 설레이는 계절의 소리도 없을 것이다. 달력을 보니 어느덧 추분…상강(찬 서리가 내린다는)이 지나 입동이 문턱이다. 들녘엔 서늘한 바람… 고추가 붉어지는 계절… 가을 들판을 생각하며 四季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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