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 일이다. 가족과 캐나다 퀘백 주로 여름 휴가를 갔다. 대학생 시절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캠핑장에서 만난 퀘백 주 출신의 여행객으로부터 불어로 된 트럼프 카드를 선물 받은 후 퀘백 주에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결혼 후 가족을 데리고 여행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우선 올림픽이 열렸던 몬트리올을 들르기로 했다. 예년의 휴가와는 달리 일부러 숙박 예약을 하지 않았다. 예약된 숙박에 여행 일정이 발목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숙소부터 찾았어야 했다. 시내로 들어갔다. 그 때 길에 “Centre-ville”이라고 써져 있는 표지판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보던 것이 왜 이 곳에 와 있을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운타운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운타운에서 겨우 숙박할 곳을 찾았는데 주차장이 따로 없었다. 건너편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라는 숙박 안내원의 권고를 무시하고 주차료를 아끼려고 숙소 옆 골목길에 주차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미처 생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주차표지판이 모두 불어로 써져 있는게 아닌가? 불어는 고등학생 때 한국에서 1년 그리고 미국에 와서도 2년을 공부했는데 주차표지판 내용 해독이 자신 없었다.
다운타운에서 주차위반을 하면 차를 끌어간다는 얘기를 들은지라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요즈음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되는데 그 때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마침 어떤 아시안 청년이 지나 갔다. 붙잡고 주차 표지판에 무어라고 써져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불어를 못 한단다. 괜찮다고 얘기했다. 불어를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니까요. 조금 후 백인 청년이 지나갔다. 놓칠새라 뛰어가서 불어를 하느냐고 영어로 물었다. 그랬더니 바로 톡 쏘는 목소리로 “I don’t speak English”란다. 아니, 지금 막 한 것은 영어 아니고 뭐야? 이 친구 불어 우월주의자인가?
두 번이나 실패하고 나니 다소 의기 소침해졌다. 그렇다고 그냥 서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용기를 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주 순박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반갑게 다가가 불어 읽으실 수 아시죠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아주머니가 머뭇머뭇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겸연쩍게 웃으면서 “이딸리아노, 이딸리아노!” 하는게 아닌가. 아마, 이탈리언 관광객이었던 모양이었다.
미국인 친구들하고 가끔 농담할 때 자기네 나라 말 밖에 못하는 사람들을 아메리칸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그 때 몬트리올 골목길에서의 나의 모습은 전형적인 아메리칸이었다. 영어만 하면 어디에 가든지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아메리칸 우월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완전 착각이었다. 영어하는 사람이 보기 싫어 일부러 안하는 경우도 있고, 미국인들이 영어 밖에 모르듯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기나라 언어 밖에 모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에피소드였다.
또한, 고등학교 때 분명히 배웠던 불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나의 우둔한 머리 탓도 있겠지만 역시 외국어는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오래 기억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마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바에는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야 비교적 일찍 고등학교 때 미국에 이민와서 공부를 했기에 미국에서 영어문제로 고통을 겪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나이가 들어 뒤늦게 이민와서 의사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덧붙여 이민 일세대와 이세대 사이에 언어 장벽으로 같은 집에 살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정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의 몬트리올 여행 후 나의 불어 실력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 다시 그 곳을 방문할 기회도 아직 없었지만 다음에 가게되면 그냥 유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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