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10월, 북가주 교외지역에서 엄마와 함께 걸어가던 어린 남매가 갑자기 덮쳐든 자동차에 치여 숨졌다. 동네 할로윈 파티에 참석했던 트로이(10)와 알라나(7)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운전자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재판과정에서 운전자는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남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얼마 전에는 6명의 의사에게 찾아가 목, 등, 다리,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6차례나 마약성 진통제 ‘비코딘’ 처방을 받아냈다. 이른바 ‘닥터 쇼핑’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독자에게 ‘수천 알의 약이 무모하게 처방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한 남매의 아버지 밥 팩은 처방 의사들이 속한 의료기업을 대상으로 의료과실 소송을 하기 위해 변호사를 물색했다. 8명의 변호사를 만나보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재판을 준비하는 변호사의 시간과 노력에 비해 받아낼 수 있는 보상금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의료과실 소송에서 피해자가 청구할 수 있는 배상금은 두 가지다. 일을 할 수 없어 벌지 못한 소득 및 장기간 치료비용 등 경제적 손실과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고생(pain and suffering)’으로 불리는 경제외적 피해에 대한 배상이다.
1970년대 의료과실 소송에 시달리다 못한 캘리포니아 의사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주의회는 경제외적 손실에 대한 배상금 상한선을 25만 달러로 제한한 관련법을 통과시켰다. 당시의 젊은 주지사 제리 브라운이 취임 첫해에 서명했던 의료부상배상개혁법(MICRA)이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경제적 손실에 대한 배상엔 제한이 없다. 그러나 MICRA에 의해 소득이 없는 어린이, 은퇴자, 주부, 빈민층은 법에 의한 보상에서 밀려나 있다. 더구나 팩의 자녀들은 죽었기 때문에 의료비 부담도 요구할 수 없었다.
분노를 참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사법제도에서 외면당한 아이들의 정의구현을 위해, 자신처럼 불행한 부모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생업을 접어둔 채 관계법 개혁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난 10년간 주의회에서 7개의 관련 법안 작성을 지원해온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온 것이 금년 11월4일 중간선거에 회부된 주민발의안 46이다.
세 가지 조항이 포함된 발의안 46의 취지는 극히 상식적이다 : 현행 의료과실 배상금 한도액은 39년 전에 정해진 것이니 업데이트 되어야한다, 마약성 진통제의 과잉처방을 줄여야 한다, 마약에 취한 의사의 환자 치료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 취지의 시행 방법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 의료과실 소송에서 ‘고통…’ 배상금 한도액을 인플레를 감안하여 인상하고(4배인 110만 달러로 올려야 한다) 향후 매년 조정한다, 마약성 진통제 등 특정약품을 처방할 때 의사는 반드시 환자의 처방기록 주 데이터베이스 확인을 해야한다, 병원근무 의사들에 대한 무작위 마약테스트를 의무화한다.
의료산업은 연 2,000억 달러 규모의 캘리포니아 최대 경제 분야다. 오바마케어와 고령인구 증가로 갈수록 더 많은 돈이 더 빠르게 몰리고 있어 각종 법안들이 추진되고 강력한 찬반로비가 동원되면서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한 가족의 비극에서 잉태된 주민발의안 46도 선거에 회부되면서 거대 이해집단들이 정면 대결하는 이권다툼에 뜨겁게 휘말리고 있다. 가장 ‘특수한’ 특수이해집단들이 편을 갈라 찬성과 반대의 패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새다.
찬성 쪽엔 의료과실 피해당사자들 외에 소비자단체 ‘컨슈머 워치독’과 법정 변호사들이 포진해 있다. 변호사들은 오랫동안 배상금 인상 로비를 벌여왔으며 이번 캠페인 자금 900만 달러의 대부분도 이들에게서 나왔다.
반대진영은 더 강력하다. 보험사와 의료계가 한편이 되어 5,700만 달러나 모았다. 반대 논리도 직설적이다 : “한 가구당 연 1,000달러가 더 드는 의료비 상승 ‘재난’이 닥칠 것이다!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보험비가 급등하는데다 마약 테스트까지 당하면 의사들은 캘리포니아를 떠나고 저소득층 지원 병원은 문을 닫을 것이며, 환자의 처방기록 데이터베이스가 강화되면 당신의 개인정보 해킹 위험이 높아지는데…그래도 변호사 돈벌이 음모에 동조할 것인가?”양쪽의 주장 모두, 상당부분 과장되었다 해도, 일리가 있다. ‘환자의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부작용을 동반하는 결함이 곳곳에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선거의 승패는 어느 쪽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캠페인의 최강 무기 ‘돈의 위력’은 이번에도 발휘되었다. 초여름 58%에 달했던 발의안 46의 여론지지는 자금 막강한 반대 캠페인 덕에 9월 중순 34%로 주저앉았다.
현재 통과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그러나 부결된다 해도 발의안 46이 제기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편투표용지는 곧 우송해야 하는데 예스? 노우? 주민발의안 46에 대한 스트레스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재난’ 수준은 아니더라도 의료비는 상승할 것이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데이터베이스 마련이 요원한 현실에서 의무화는 무의미하며, 왜 의사만 의무적 마약테스트를? 모욕적인 사생활 침해 아닐까…결국 ‘개악’보다는 ‘현상유지’가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 같은 유권자들이 주저하며 반대한 이슈를 면밀히 검토 분석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 입법화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새 주의회에 걸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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