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는 아직도 팔십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서도 계절의 변화는 어쩔 수 없나보다. 아침 저녁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고 새벽 공기는 맑고도 차갑다. 벌써 나무 잎새들은 노란색 붉은색으로 갈아 입으려 하고, 땅 바닥에 딩구는 낙엽들의 모습이 애잔하다.
아! 가을인가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속으로 탄성을 지른다. 왜 가을은 사람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고 센치하게 하고 지나간 추억들의 뒤안길로 안내해주는지 모른다. 그 속에 떠오르는 여러개의 얼굴들이 갑자기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직 살아있으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며,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까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슬퍼지기도 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사람들을 사색하게 만든다. 결국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일생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던가?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얻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 옛날 에덴 동산에서 욕심과 불순종으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후 우리들은 끊임없이 또 다른 에덴 동산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 인생이란 길인지도 모른다.
어느 작가가 토크쇼에 나와서 인생의 정답은 없다고 말했다. 오직 명답이 있을 뿐이라는 얘기를 감동 있게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래,각기 다 다른 인생을 살아 가는데 정답이 있을수가 없다’고 공감했다.
그래서 인생은 더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우리가 매일 모이는 운동 그룹이 있는데, 끝나면 모두 커피샾으로 몰려가서 그야말로 인생 토론을 한다. 공짜 커피맛도 좋지만 공짜로 얻어 듣는 여러가지 삶의 지혜인 명품 이야기들이 더 쏠쏠하다. 어떻게 하면 늙그막에 더 나은 건강을 지킬까하는 정보에서부터 한국의 정치 이야기며 자식들의 이야기, 맨날 하루 세끼를 고집하는 간 큰 남편들의 이야기를 몰래 흉도 보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웃으면서 우리들은 다같이 행복해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난 이 팔십대가 정말 행복해!"라고. 그렇다면 나도 난 정말 이 칠십대가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고 싶다. 늙으면 무엇보다 사람 부자가 최고라는 말도 했다. 어느 정도의 쓸 돈과 건강과 속 썩이지 않는 자식들과 친구들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여기 라스모어에 사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 우리 그룹은 최고로 행복하다고 모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신들이 당당하게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다. 또 한가지 이곳에 살면서 더 재미있는 것은 여러가지의 과일들과 열매들을 철철이 따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름에는 무화과, 가을에는 주홍색으로 붉게 물든 달디단 감이며 향기나는 구아바며 은행, 도토리까지 골고루 주워 먹을 수 있는 것도 행복의 조건 중에 하나다. 팔십대의 한 이웃은 지천으로 떨어진 굵은 도토리를 주으며 "아! 재미있어!"하며 그날 너무 행복해 하셨다. 그 모습이 정말 티없는 소녀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국에서 많은 노인들이 건강을 잃고 돈도 없고 자식들에게까지 외면 당하면서 외로움과 고통 중에 살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곳 미국에서도 아마 그런 노인들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이곳 라스모어에서도 사람들과 등을 진 채 홀로 외롭게 늙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듯 자신들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초한 채, 늘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형의 사람들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 가족들과 아웅다웅하며 그래도 정답게 살아가고, 이웃과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맛있는 음식들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야 그것이 사람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이렇듯 매일처럼 시시각각으로 만나는 시림들이 언젠가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면 얼마나 슬플까를…. 그러나 인간은 결국 혼자서 마지막 길을 떠나가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 이 시간이 중요하고, 함께 만나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장식하는 사람들, 고마운 친구들이다. 저녁에 산책을 하는데 주홍색 감 하나가 덩그라니 나무에 달려있다, 마치 오 헨리가 쓴 마지막 잎새처럼. 갑자기 날아오른 새 한마리가 그 빨간 감을 쪼아 먹기 시작한다. 이 동네는 인간과 동물들이 함께 동생동락 하는 곳이다. 다람쥐도 어디선가 쪼르르 달려나와 참나무에서 떨어진 실한 도토리들을 까먹기 시작한다. 나무 뒤에 매달린 너구리도 고개를 빠꼼히 내밀고 나를 탐색한다. 사슴들도 물을 찾아 언덕 밑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아!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도 고마운 생각이 든다. 언제나 넉넉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내 손을 이끄시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손길이 오늘따라 더 고맙고 감사한 생각이 드는 어느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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