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선
가을이 깊어 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을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다.높고 맑은 하늘 아래 울긋불긋 오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 빛나는 햇살에 곡식과 과일이 익어 가듯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일러 “불사춘광승사춘광(不似春光 勝似春光-봄은 아니로되 봄빛을 능가하는 아름다움” 이라고 표현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신의)사랑이 가득하다.”고 가을을 노래하는 가수도 있다.
“가을밤의 싸늘한 기온 / 밖으로 나서니 /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 불그레한 달이 / 울타리 너머로 / 나를 보고 있었다.” 고 가을의 풍경을 묘사한 영국의 시인도 있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독일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가을날에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 주여,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남국의 해를 이틀만 더 허락하시어 / 독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어디 그뿐인가? 가을이 되면 말이나 글로 다 할 수 없는 가슴 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을 느낀다는 김용택 시인은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도 하고, 마른 나무 가지에 홀로 앉아 기도하는 새가 되기를 소망하는 어느 명상가는 가을을 “고독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만산홍엽(滿山 紅葉)” 이라고 하던가? 혹자는 가을을 “단풍의 계절” 이라고도 하고, 결혼 청첩장이 낙엽처럼 자주 날라 오는 가을을 “결혼의 계절”이라고 하는 이들도 많다.
50여 년 전 10월에 남편과 결혼을 했기에 가을을 “결혼의 계절”로 여기고 있는 나는 해마다 가을에 유난히 많은 결혼식을 바라보면서 갖가지 사연과 감동으로 점철 된 우리네 삶을 돌이켜 보는 감회에 젖기도 한다.
우리네 삶의 경조사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게 마련이어서, 그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실망과 좌절을 맛보게도 하는데, 어느새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2014년 초가을, 나의 오래된 친구 A로부터 날아온 사연이 또 하나의 감동으로 나를 눈물짓게 하였다.
10여 년 전, 나의 친구 A의 아들이 결혼을 하였다. 결혼식에는 많은 친인척들이 왔는데 그 중에서 한 친구가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주었다고 한다. 대부분 필요한 생활 용품을 결혼 선물로 주고받는 미국과 달리 한국인의 결혼식에서는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의 “축의금”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간이라고는 하나 친구로부터 “일백만 원”이라는 거액의 축의금을 받으면서 내 친구 A는 고마움과 아울러 약간의 부담감을 안게 되었는데, 얼마 전에 친구 A는 10년 전에 축의금으로 일백만 원을 준 친구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풍족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던 나의 친구A는 친구에게 늘 가지고 있던 마음의 빚(?)을 이 기회에 갚으리라 생각하고 은행 융자를 얻기로 부인과 의논을 하였다고 한다.
비록 은행 융자를 얻었을망정 성의껏 마련한 축의금을 친구에게 건네고 홀가분해 진 마음으로 귀가 한 며칠 후, 나의 친구 A는 한 통의 등기 우편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며칠 전에 아들을 결혼시킨 그의 친구가 보낸 것으로 봉투 안에는 감사의 카드와 함께 한 장의 현금 수표가 들어 있었는데 카드에는 낯익은 친구의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있는 /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친구가 아닌가? / 너의 축의금 일백만 원은 참으로 고맙구나. / 그러나 나는 일십 만원만 받고 여기 구십만 원을 보낸다. / 너는 나를 알고 나는 너를 아는 /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는 친구가 아닌가? / 만일 이것을 네가 받지 않는다면 / 너는 나의 친구가 아니라고 여기겠다. / 가을이 가기 전에 / 우리 한번 다시 만나 / 너와 내가 잘 가던 포장마차에서 / 소주나 한잔하세 나의 친구여!”
아아, 이러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친구 A가 이 가을에 내게 보내 온 “등기 우편 이야기”는 어느 시인이 쓴 시보다 더욱 아름다운 또 하나의 명시로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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