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ear of the LORD is thebeginning of knowledge.
주(主)님을 두려워함은 앎의 시작이다.
혹시 아십니까? 우린 진짜 모르고 산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실겁니다. 대부분 모르고 산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뭘까요? 뭘 아는 게 진짜아는 걸까요? 아는 건 안다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 하는 게 진정 아는거라는 성현의 말씀을 모르는 바는아닙니다. 그럼에도, 무엇을 일러 진짜 앎’ ‘이라 이르는 지 실로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선, 왜 사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게 대부분사람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들기전 부’ 모미생전 진면목’이란 말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다는 예수님의 거룩한 외침. BeforeAbraham was, I AM! 이 말씀의 속내를 반듯하게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않습니다.
이 삶이 끝나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 또한 과연 모를일입니다.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이라 하든가요? 알 수 없다는거죠. 앎이라는 뜻의 그’ 노스’에 아니라는 뜻의 ‘a’가 떡 붙으니 ‘a + gnos’즉 앎에서 멀다는 뜻이 됩니다. 알수 없다는 겁니다. 신(神)이 뭔지, 생사가 뭔지, 삶 이전과 죽음 이후가뭔지, 창조는 뭐고 진화는 뭔지 ... 모든 게 그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애그나~스티씨즘’이란 이름 뒤에점잖게 숨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여기 기쁜 소식이하나 있습니다. 앎의 시작을 힌트하는 소식입니다.
The fear of the LORD is thebeginning of knowledge: but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주(主)님을 두려워함은 앎의 시작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교훈을 업신여긴다.
내 인생의 참 주인, 그래서 ‘주(主)님’이라 경외하는 그분을 두려워 하는 게 바로 앎’ ‘의 시작이라는 힌트입니다. 그렇습니다. 힌트입니다. 힌트[hint]는 말 그대로 실마리가 됩니다.
무지와 무명(無明)을 뚫고 나와 찬란한 빛과 만나는 통로가 바로 그힌트입니다. 불가지론을 단박에 해결하는 실마리[힌트]가 바로 ‘주(主)님’을 알고 경외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앎’의 시작이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지혜서 "잠언(箴言,Proverbs)"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하며 //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
그리고 7장에 이르러 드디어 그 거룩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 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주(主)님’을 두려워 하는 이는 우선 ‘주(主)님’의 실존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 (主)님’이란 게 뭐 따로 있겠냐는 사람은 두려워 할 대상 자체를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잠언(箴言, Proverbs)" 1장 7절이 제대로 접수되기 위해선 우선 ‘주(主)님’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수 조건일 터입니다. 인정도 하지 못할 대상을 어찌 두려워 할 수 있으리오? 그렇다면, ‘앎’의 시작은 그리 호락호락한일이 아닙니다.
The fear of the LORD is thebeginning of knowledge.
주(主)님을 경외함은 앎의 시작이다.
알고보면, 문제는 그리 복잡하지만은 않습니다. ‘주(主)님’을 인정하지않는 건 바로 나와 모든 생명을 만들어 낸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모두 저’ 절로’ 그냥 생겨나고 진화하는 거지 따로 무슨 조물주같은 게 있어서 세상이 이런 모양으로 굴러 가는 게 아니라는 ‘똑똑한’ 발상에서 나온 생각, 그게 바로 ‘주(主)님’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막연하기 그지없는 이유입니다. 내가왜 종이고 조물주가 왜 주(主)라는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안 믿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못 믿겠다는데. ‘주(主)님’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 결국 경외(敬畏)할 대상 또한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앎’은 시작조차 어렵게됩니다. 지혜의 근원에서 멀어지고맙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서로 말합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일컬어진다네. 본래 의롭지 못한 인간이지만,다만 ‘주(主)님’을 믿고 두려워 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이런 말 또한 우이독경이 되고 맙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믿어지는 것, 그게 바로 은혜랍니다." 진짜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게 바로 은혜[Grace]라는 걸까요?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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