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무실 벽에는 善行無轍跡(선행무철적)이라는 글귀가 걸려있다. 그 글귀는 내가 대학교 시절에 도올 김용옥 씨를 처음 만나면서 접했다. 내가 1년간 휴학하고 대만에 가 있다가 돌아와 막 4학년으로 복학했을 때다. 노자의 도덕경 공부 모임이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유학온 대학원생들과 연구 차 와 계신 교수님들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였다. 그 때 모임 장소가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김용옥 씨의 아파트였다.
모두 모여야 7-8명 정도의 소규모였는데 유일한 대학생인 내가 다른 참석자들을 좇아가기는 버거웠다. 나에게는 대만에 가서 중국어를 조금 공부했다는 그 하나 이유로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일천한 한문 실력으로 도덕경을 해독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였다. 본문은 물론 옆에 달아 놓은 한문 주석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용옥 씨는 국립대만대학에서 관련된 석사 학위 논문을 쓸만큼 도덕경을 좋아했고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다.
그래서 주로 그가 강의했고 연구 차 와 계신 교수님 한 분이 가끔 옆에서 거드는 모습을 취했다.
그런 가운데 도덕경 27장에 나오는 ‘善行無轍跡’을 해석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轍跡’이 바퀴자국 흔적이라는 뜻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善行’에 이르러서 김용옥 씨의 해석이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나에게는 그냥 ‘착한 행위’라는 해석이 당연했다.
그런데 김용옥 씨는 이에 대해 ‘잘 간다’라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고 자신은 오히려 ‘빨리 달린다’라는 뜻으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 달리는 마차는 바퀴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해석에 감탄했다.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선행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즉, ‘착한 일은 남 모르게 하라’는 해석이 더 의미 있고 내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덕경 공부를 다 마치고 종강식 때 참가자들 모두 도덕경에서 나오는 글귀를 졸업장(?)인 양 하나씩 선물로 받았다. 붓글씨에도 뛰어난 김용옥 씨가 손수 써 주었던 것이다. 내가 받은 글귀는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였다. 도덕경 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귀는 나에게는 대학 시절 뿐 아니라 김용옥 씨를 만나 알고 지내던 추억을 되새길 수 있게 한다.
도덕경을 공부하면서 만난 김용옥 씨는 이미 그 시절에도 특별했다. 당시 겨우 30대 초의 나이로 학자로 치자면 이제 막 입문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에 대해서는 자긍심이 대단히 강했다.
한국서 연구 차 와 계시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위의 교수님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항상 자신에 차 있었다. 독서량도 그 어느 누구에 비교해 손색이 없다고 했다. 외국어 실력도 출중해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했고 독일어도 원서를 읽을 실력은 된다고 했다.
물론 대만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을 했으니 그 세 나라 언어를 잘 하는 것에는 놀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 남다른 노력을 보이며 언어에 재질이 있는 것은 분명한 듯했다.
그런데 워낙 자신에 대한 큰 자신감은 주위로부터 좋은 얘기를 못 듣게 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겸양이 덕목으로 여겨지는 한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더욱이 말이다. 그런 그가 귀국해 모교에서 교수직을 맡은 후에도 거침 없는 발언을 계속 함으로써 학계에서도 동지만큼 적도 적잖이 만들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용옥 씨를 생각하면 또 기억나는 것은 그의 자전거이다. 학교 캠퍼스나 근처를 부인, 딸과 함께 한 가족 셋이 종종 같이 타고 다녔다. 그런 진기한 모습은 그 자전거에 누군가가 눈독을 들이게 했고 어느 날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세 명이 같이 타고 다니는 바람에 평범한 자전거가 제법 가치가 있어 보였던 모양이라고 했다.
이제 60대 중반이 넘은 김용옥 씨를 대학교 졸업 후 한번도 다시 뵌 적이 없다. 더 늦기 전에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만나서 그냥 어떻게 지내셨는지 여쭙고 언론이나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얘기들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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