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만큼 맷집 강한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지난 봄 뉴욕매거진이 “스캔들은 클린턴을 사랑한다”라고 표현했듯이 모니카 르윈스키에서 화이트워터, 트래블게이트, 벵가지 사태에 이르기까지 온갖 스캔들에 휘말린 정치폭풍 속에서 살아남아 다시 정상을 눈앞에 둔 힐러리는 강인한 ‘서바이버’다.
공화당의 선거전략가 칼 로브는 네거티브 캠페인의 달인이다. 아들 부시의 두 번 텍사스 주지사 당선과 두 번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캠페인 참여에서 41전 37승을 거둔 가히 선거전의 귀재이지만 그의 최강 특기는 비열한 중상모략, 무자비한 인신공격이다. 공화경선에서 부시와 맞붙었던 존 매케인은 입양한 흑인 딸이 혼외정사 사생아라는 흑색선전에 시달렸고, 2004년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를 추락시킨 베트남전 전과조작 논란도 로브의 작품이었다.
워싱턴 정가는 보통 5대 TV의 선데이모닝 시사토크쇼로 한 주를 개막한다. 지난 일요일 아침 주요 이슈들을 압도한 워싱턴의 화제는 “힐러리!”였다. NBC, ABC, CBS, CNN과 폭스뉴스 - 5개 채널 토크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힐러리 클린턴, 워싱턴포스트가 집계에 의하면 무려 98차례에 달했다. 아직 출마여부도 밝히지 않은 힐러리의 2016년 대선 승리 가능성 예측과 함께 공화당의 공격과 민주당의 두둔이 난무하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발단은 지난주 로브의 발언이었다. 2012년 힐러리가 국무장관 재임시 가벼운 뇌진탕 증세로 입원했던 일을 거론하며 건강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힐러리가 사흘간 입원했던 것을 로브가 몰랐겠는가. “30일간 입원했었죠? 다시 나타났을 땐 외상성 뇌손상(TBI) 앓는 사람들이 쓰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지요?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TBI는 이라크참전 미군들이 가장 고통받는 후유증의 하나다.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는 암시를 던져놓은 후 잠시 후퇴했다가 자신이 불붙인 논쟁을 부채질하여 계속되는 언론보도로 유권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은 로브의 전형적 수법으로 알려졌는데 18일 폭스뉴스에 출연한 그는 힐러리의 “건강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라며 한발 빼는 듯하더니 이번엔 2016년에 69세가 되는 힐러리의 나이를 건드렸다. 힐러리의 약점으로 꼽히는 나이와 건강, 그러나 출마를 결정한다면 당연히 거론될 이슈들을 그는 상당히 빨리, 상당히 자극적으로 불붙인 것이다.
힐러리의 출마에 대한 양당의 시각엔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통점이 있다. 두려움이다. 공화당은 힐러리의 출마를 두려워하고 민주당은 힐러리의 불출마를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모든 공화후보와의 가상대결에서 완승을 거둔 막강후보 힐러리가 공화당에겐 겁나는 존재이고 민주당은 힐러리가 사라진 당 경선이 도토리 키 재기가 될까 불안한 것이다.
로브를 앞세운 공화당의 느닷없는 이번 힐러리 때리기가 치밀한 플랜의 전략인지 즉흥적 해프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체계적이든 산발적이든 힐러리의 20여년 공직생활 사사건건을 들추어가는 공격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또 흑색선전은 대부분의 경우 상당히 효과적인 선거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엔 상대를 잘못 택했다고 힐러리진영은 단언한다.
“로브의 천박한 전략” 정도로 위협당하거나 흔들릴 힐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같은 공화당의 공격은 오히려 초기에 맷집을 더 키우게 할 뿐 아니라 유권자의 호감을 얻는데도 도움이 된다. 공격에 상처받고 반격하는 동안 막강한 대세론의 선두주자에서 피 흘리는 언더독으로 고전하며 유권자의 응원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정작 힐러리가 출마를 결정한다면 넘어야할 높은 산은 공화당의 이런 공격이 아니다. 계속 인기가 하락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8년이 초래한 민주당에 대한 염증과 힐러리 자신의 오랜 정치경력으로 각인된 기성정치인의 이미지다. 2차대전 이후 한 정당이 대선에서 3번 연속 승리한 것은 레이건에 뒤를 이은 아버지 부시의 당선 한 차례뿐이었다.
2016년의 힐러리는 2008년보다 훨씬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지금의 힐러리는 대세론에 안주했던 당시의 ‘엘리트 후보’에서 서민과의 공감대 넓힌 친근한 정치인으로 대폭 탈바꿈했다고 민주당 유권자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표밭이 가장 선호하는 신선한 새 얼굴, ‘익사이팅한’ 후보는 아니다. 자신의 최대 자산인 경험을 강조하는 ‘올드 힐러리’와 보통사람에게 다가가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는 ‘뉴 힐러리’를 적절히 배합한 새로운 이미지 창출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그에겐 다른 후보들이 갖지 못한 변함 없는 지원군이 있다.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더 늦기 전에 함께 완수하기 고대하는 나이든 여성유권자들이다. 어쩌면 공화당이 가장 두려워해야할 것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갈 이들 여성표밭의 뜨거운 열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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