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 정찬열의 산티아고 순례길 2,000리
▶ ⑥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로스 아르꼬스까지
꼭지를 틀면 와인이 쏟아지는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수도꼭지다.
“발님이 무사해야 이 길을 마칠 수 있을 텐데… ” 무릎이 아파 옆으로 걷고 있는 아내.
▲여섯 번째 이야기(5월1~2일)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에스텔라(Estella) - 로스 아르꼬스(Los Arcos) 까지 - 43.1K# (5월 1일) - 어둑어둑한 새벽에 출발한다. 잔디밭에 텐트 2개가 세워져있다. 어제 만났던, 개를 데리고 온 가족이 자고 있는 모양이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아내가 다리를 절뚝거린다. 김사장이 압박붕대를 감아보자고 한다. 길가 의자에 앉아 붕대를 꺼내 감아주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한국에서 응급처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붕대 한 세트를 꺼내 주면서 필요할 때 쓰라고 한다. 김사장 배낭이 무거운 이유를 알겠다. 발님이 무사해야 이 길을 마칠 수 있을 텐데, 모를 일이다.
2층 건물,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장대를 세우고 빨래 줄을 길게 걸어 마당에 옷을 말리던 풍경이 떠오른다. 식구가 몇이나 되는지, 남자가 몇이고 여자가 몇인지 널려있는 빨래를 보면 짐작이 간다. 햇빛에 뽀송뽀송 빨래를 말리는 모습이 참 오랜만이다.
마을을 벗어나자 밀밭이 펼쳐진다. 밀이 동이 배었다. 밀 하나를 뽑았다. 동이 밴 밀은 임신한 여인의 몸매처럼 둥그스름하고 매끈하다. 말랑말랑한 이놈이 나날이 단단해져, 머리를 풀고 피어나 햇빛을 받으며 익어갈 것이다. 저렇게 푸르디푸른 밀밭이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들판이 된다. 시간은 그렇게 색깔을 바꾸어놓는다.
Cirauqui 마을 카페에 먼저 온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카페 옆 작은 입석이 눈길을 끈다. 1658년에 세워진 문양석이다. 몇 십 년 역사는 여기서 명함도 못 내놓겠다.
마을들이 성처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길에서 여학생 두 명을 만났다. 불가리아 출신인데 호주에서 유학중이라고 한다. 두 녀석이 자기나라 국기를 배낭에 걸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국기를 달고 가는 젊은이는 처음이다. 기특하다. 불가리아의 미래를 보는 듯싶다. 작년에 한국 청년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미 대륙 횡단을 했었는데 그 때, 그들도 태극기를 달고 횡단했다던가.
에스텔라Estella다. 천년쯤 전에 나바라 왕국의 왕이 순례자를 위해 만든 도시란다. 까미노 중에서 가장 산티아고를 잘 느낄 수 있는 도시여서 15세기 순례자들이 ‘아름다운 별Estella’이라고 불렀다는 곳이다.
도시 입구에 성당건물이 서 있다. 지붕위에 풀이 수북하고, 정문 양쪽에 서 있는 성인의 석상이 손도 코도 입도 사라져 흐물흐물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갔을까.
알베르게에 1시 30분 도착. 샤워를 한 다음 도시 구경을 나갔다. 천년 전에 이렇게 멋진 도시를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건물은 돌로 되어있고 거리도 돌을 박아 만들어 놓았다. 만년도 더 견뎌낼 수 있을 성 싶다.
역사적인 건물이 많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San Miguel 성당, 1259년에 세워진 Santo Domingo수도원, Palacio del los reyes 나바라 왕궁 등, 도시 전체가 흥미진진한 유적이다. 성당이나 수도원 곳곳에 박혀있는 조각품에 옛 장인들의 솜씨가 남아있다. 사람은 갔지만 작품들은 고스란히 남아 후세에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다.
길가 고서점에 성서가 진열되어있다. 1676년에 발행된 성서인데 280유로에 판다고 적혀 있다.
▲5월2일- 아침 일찍 알베르게를 출발하여 3km쯤 걸어가니 이레체Irache 수도원이 보인다. 수도원 도착하기 전에 이레체 와인공장에서 운영하는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다. 오른쪽을 틀면 물이 나오고, 왼쪽은 와인이 나온다. 옛날 이곳 순례자 병원에서 빵과 와인을 나누어주던 전통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1891년부터 이 서비스를 해오고 있단다. “18세 미만은 와인을 마시지 말라”는 문구가 안내판에 적혀있다. 나는 18세가 넘었으니 괜찮겠다고 농담을 하며 왼쪽 꼭지를 틀었다. 레드 와인이 쏟아진다. 꼭지를 틀면 불그레한 와인이 나오는,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수도꼭지다. 빈 병에 반쯤 채워 홀짝거리며 걸어간다. 새벽부터 와인을 마셨더니 좀 알딸딸하다.
키가 작달막한 여인이 나를 앞질러 걸어간다.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큰 배낭을 짊어졌다. 또글또글 굴러가듯 잘도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가더니 언덕에 배낭을 내려놓고 멈추어 선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미국 플로리다에서 왔다고 한다. 배낭이 무겁지 않느냐고 했더니 씩 웃는다. 이름은 마이클링, 올해 예순 일곱 살이란다. 돌아가신 남편의 생일이 오는 6월인데 생일미사를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꼭 드려주고 싶다고 한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연이 이렇게 제각각이다.
내가 산티아고 길을 간다고 하자 어떤 후배가 말했다. 그렇게 긴 여행을 하려면 건강과 시간, 그리고 돈이 있어야 할텐데 참 부럽습니다, 라고. 얼핏 생각하면 틀림없는 말인데, 곰곰 따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나도 거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건강이 좋지 않고 시간이 쪼들린 사람도, 그리고 돈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꼭 가야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결국 선택과 의지의 문제다. 이 길을 가면서 만났던 92세 할아버지, 말기 암을 앓고 있다는 호주 아주머니, 그리고 없는 시간 쪼개어 나왔다는 영국 아가씨, 공장에 다닌다는 독일 남자. 이런 사람들이 좋은 예다.
1시30분경 로스 아르꼬스(Los Arcos) 도착. Santa Maria성당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바로크 스타일 장식과 고딕 양식의 회랑, 그리고 1516년에 만들었다는 성가대의 좌석, 내부를 빙 둘러 장식된 섬세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품들, 청동작품에 금을 도금한 성당의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16세기에 만들어진 르레상스 양식의 타워는 3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작은 도시의 한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스페인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 얼마나 많은 재물을 세상으로부터 빼앗아 왔을까, 얼마나 큰 영화를 누렸을까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을까를 함께 생각해본다. 미사가 시작된다. 음악이 울려 퍼진다. 장엄하다.
침대에 누웠다. 목이 칼칼하여 수건을 물에 적셔 널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잠시 죽음을 연습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살아있는 동안 나는 무엇이었나. 누구에게 저기 저 물수건만큼이라도 도움을 준 적이 있었을까. 정채봉 시인이 쓴 ‘수건’이라는 시 한 편이 생각난다.
“눈 내리는 수도원의 밤 / 잠은 오지 않고 / 방안은 건조해서 / 흠뻑 물에 적셔 널어놓은 수건이 / 밤 사이에 바짝 말라버렸다 / 저 하잘것 없는 수건조차 / 자기 가진 물기를 아낌없이 주는데 / 나는 그 누구에게 /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 켜켜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 눈송이도 되지 못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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