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개봉한 브루노 뒤농(55) 감독의 프랑스 영화‘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1915)은 1988년 발표된 브루노 누이탕(68) 감독의‘까미유 끌로델’의 후속편같은 느낌이다. 1988년작이 까미유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1913년의 모습으로 막을 내렸다면 2013년작은 그후 30년간을 정신병원에서 나오지 못한 까미유의 1915년의 한때를 그렸다. 1988년작이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940~1917)의 조수이자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1864~1943)의 드라마틱한 삶을 극적 구성으로 보여주며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면, 2013년작은 결코 대중적으로 보기 쉬운 영화는 아니다. 장시간의 롱테이크와 클로즈업, 기나긴 독백이 이어지며 관객을 사유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까미유 역은 세계적 여우 줄리에트 비노슈(49)가 맡았다. 연기에 거칠 것 없는 이 배우는 과감히 나신을 드러내고 화장기 없는 창백한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79세에 생을 마감한 이 천재 예술가의 비운의 말년을 단 3일간의 장면으로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사실 더 이상의 긴 시간적 배경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이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삶을 근 30년 동안 엇비슷하게 살아갔을테니 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1988년작에서 까미유 역을 맡았던 이자벨 아자니(58)의 잔영을 벗어 던질만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실제 연약한 듯 보이면서도 영민한 눈빛을 지닌 미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의 아름다운 외모와 이자벨 아자니가 더 닮아있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현재, 줄리에트 비노슈가 분한 중년의 까미유 끌로델은 별다른 환경적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내면을 시각화해냈다는데서 깊은 연기 내공을 느낄 수 있다.
대사와 여러 상황을 통해서 까미유의 처지가 드러나긴 하지만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까미유 끌로델의 생애를 다시한번 숙지할 필요가 있다. 까미유의 어머니는 오빠의 죽음 이후 태어난 까미유를 무의식적으로 미워하고, 여동생 루이즈만 편애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까미유와 훗날 극작가와 시인,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는 남동생 폴(1868~1955)은 서로를 의지하고 독서열을 나누며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예술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 19세의 까미유는 로댕의 아틀리에에 제작조수로 들어가며 그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연인이 된다. 까미유는 로댕과의 결혼을 원했으나 로댕은 오랜 동거녀였던 헌신적인 로즈 뵈레를 선택했고, 원치 않는 낙태를 한 까미유는 로댕의 곁을 떠나 독립한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여성 예술가에게 쏟아지는 편견을 딛고 활동하던 까미유는 1905년 정신병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인한 편집증 진단을 받은 그녀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훔쳐갔으며 자신을 독살하려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파괴하고 칩거한다. 1913년 그녀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며 재정적 도움을 주던 아버지의 죽음 직후 남동생 폴의 주도로 파리 근교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이듬해 독일군이 침략하자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서 6㎞ 떨어진 지역의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옮겨간다.
까미유와 폴 사이에 오간 편지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폴의 작품들과 까미유의 진료기록 등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1915년 겨울, 가족 중 유일하게 가끔이나마 자신을 방문해주곤 했던 폴을 기다리는 이틀, 그리고 폴의 여정과 폴을 만나는 3일째 되던 날의 풍경을 조용히 늘어놓으며 까미유가 얼마나 숨 막힐 듯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 지를 관객들이 그대로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까미유의 모습은 폭력적이지도 않고 창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갈구하는 예민한 감성의 초조한 예술가로만 보여진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고양이랑 혼자 살아서요?” “그건 여성에 대한 착취야” “로댕은 내가 자기보다 더 잘 될까봐 내 것을 뺏기만 했어”와 같은 그녀의 논리적 호소는 아직까지 창작의 권한은 남성에게만 있고 여성은 독립적 자존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 피해의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 정황을 보여준다. 서양화가이자 문학가로 한국 신여성의 효시라 불리는 나혜석(1896~1949)이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와 겹쳐진다.
아버지도 잃고 남편도 없는 누이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하는 남동생은 누나를 맡긴 시설에 큰돈을 희사해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할 뿐이다. 당시 정신병자에 대한 처우를 생각할 때 이 요양시설은 수녀들에 의해 운영되며 상당히 전인적 활동이 가능한 곳이다. 그러나 까미유를 제외하고는 대개 정신박약 등 뇌에 손상을 입어 실성한 이들이 수용돼있는 것 같다. 뜻을 알 수 없는 괴성과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곳에서 까미유는 눈물을 흘리며 노의사에게 하소연한다. “여기 있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얼마나 더 있어야 하죠? 죄수보다 더해요. 변호사도 없고, 이 지옥에서 꺼내줄 가족도 없고, 난로, 음식, 기본적 생필품도 없이 날 갖고 놀고 있어요. 부모님조차 날 버렸어요. 사람을 이렇게 방치할 수 있나, 너무 서글퍼서 주체가 안 돼요.”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것 같은 요양시설의 겨울은 까미유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대변한다. 날선 북풍에 푸른빛이 모두 가신 황량하고 메마른 돌산과 나목, 그 아래 세워진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의 삭막한 정경은 까미유를 점점 더 고갈시켜버린다.
먼 길을 자동차를 직접 몰아 면회 오는 남동생 폴(장 뤽 뱅상)만의 그녀의 희망이다. 그러나 폴은 누나를 이해하면서도 거리를 두려한다. 추운 겨울, 하룻밤 묵어가는 수도원 객실에서 웃통을 벗고 글을 써내려가는 폴의 모습은 자기극복을 위한 단련으로 자신을 지탱해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의 신앙고백은 까미유로 대변되는 ‘광기’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나름의 고뇌를 드러낸다.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와 수염, 말끔한 얼굴과 이마에 푸른 핏줄이 솟을 정도로 날이 선 표정은 그의 결벽성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정신병은 진정한 천재성과 맞물린다. 까미유 누나는 과대망상과 피해의식, 자부심과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누나와 기질이 비슷하다. 마음이 약하다 보니 몽상가다. 신앙이 없었다면 누나보다 심했을 것이다”라고 쓴다. “누나를 2년간 병원에 가두고, 아이를 죽여 구천을 떠돌게 한 끔찍한 죄”에 대해 버거워하면서 “나는 정녕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일까?”라며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한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까미유의 퇴원을 권유하는 노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가버리는 폴의 태도다. 부양할 아이가 넷이나 되는 폴은 “살기가 너무 힘들어, 소음이 너무 심해”라며 조각을 다시 하며 어머니와 다시 살고 싶다는 누나의 애원을 묵살하고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려버린다. 까미유의 장례식에는 폴조차 나타나지 않았고, 공동매장돼버린 시신을 찾을 길도 없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졌던 그녀는 1980년대 들어서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우연이었을까. 별 배경음악이 없는 이 영화에서 폴이 말하는 장면에서는 날파리가 윙윙대는 소리가, 까미유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맑은 새소리가 흐른다. 누나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을 빙자해 방치했던 폴의 이기심과 위선을 야유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지 짐작해본다. 반면 미소 띤 까미유의 초연한 표정은 결백한 희생자의 얼굴이다. 성가곡으로 마무리 되는 것도 그렇다.
<김태은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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