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하원, 민주당과 공화당의 벼랑 끝 대치로 어수선한 워싱턴 정부폐쇄의 와중에서도 연방대법원은 예정대로, 무사히, 이번 주부터 새 회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념대결에서 비롯된 정치권 ‘위기’ 해결을 위해 대법원이 장기적으로라도 타협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낫다.
7일 개정한 이번 2013-2014년 회기는 특히 더 그렇다. 주요 케이스 대부분이 국론을 양분시키고 있는 대표적 이슈들인데다 9명 대법관 중 보수와 진보가 5대4로 팽팽히 갈린 현 대법원의 이념지형으로 볼 때 상당수 판결이 중도적 합의보다는 여론 양극화를 부추기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다분해서다.
지난 두 회기 동안 진보진영이 오바마케어와 동성결혼 합헌 판결을 통해 우경화 대법원에선 기대 못했던 ‘승리의 감격’을 맛보았다면 이번은 보수진영이 ‘압승’의 기대로 설레고 있는 회기다. 단순히 보수에 이로운 판결을 넘어 오래된 진보적 판례들을 무효화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9번째 회기인 내년 6월말까지 9개월간 다룰 약 70건의 케이스 중엔 낙태와 피임, 종교와 어퍼머티브 액션, 선거 기부금까지 우파가 목숨 걸고 추진해온 사회적 이슈들이 보수파 대법관 다수가 손들어 주기를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에릭 시걸 조지아 주립법대교수가 LA타임스 기고에서 ‘리버럴의 악몽?’이라고 표현하며 우려했을 정도다.
첫 주요 케이스로 지목된 선거기부금 제한법의 위헌소송은 이미 지난 8일 심의를 마쳤고, 다음 주엔 대입사정에서 소수계 우대정책을 금지한 미시간 주의 주민발의 헌법개정안을 통해 어퍼머티브 액션을 다룰 것이며, 11월초엔 타운 정부위원회 미팅 때 기독교 목사의 개회기도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는가를 진단한 후, 내년엔 여성의 낙태권을 제한하려는 오클라호마 주법의 합헌성 여부를 가리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종업원 직장의료보험에서 고용주의 종교적 신념에 반하는 피임약까지 커버해야하는 것은 고용주의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하는 위헌소송을 통해 오바마케어를 다시 한 번 심의하게 된다.
정부미팅 개회기도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심사는 30년 만에 처음이며 아직도 격렬한 논쟁을 부르는 낙태관련 케이스들이 올라온 것도 7년 만이다. 37년 전의 선거자금제한 판결과 31년 전의 어퍼머티브 액션 판결의 무효화 등 이례적으로 많은 선례들이 위험에 처한 것도 새 회기의 특징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번 회기를 ‘속편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상당수 이슈가 되풀이 심의되어온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첫 주에 다룬 선거기부금 제한법 관련 소송이 그렇다. 기업과 노조로부터의 무제한 선거자금을 허용한 2010년 연방대법원의 ‘시민연합’ 판결의 확대 혹은 다음 단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맥커천 대 연방선관위’로 명명된 이 케이스는 앨라배마 사업가 션 맥커천과 공화당 전국위가 제기한 소송이다. 개인이 매2년마다 연방선거 캠페인에 직접 줄 수 있는 기부금을 12만 3,200달러로 제한하고 있는 현행법에 대한 도전이다. 이들은 기부금 총액을 제한하는 선거자금법은 기부하는 개인의 표현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판결은 ‘선출직 정치가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돈을 기부하는 표현의 자유’와 ‘부패한 돈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체제’ -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우선하는가에 대한 오랜 논쟁의 결론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로버츠 대법원은 몬태나와 애리조나의 선거자금 제한법 무효화 등을 비롯한 일련의 판결을 통해 거액이 쏟아져 들어가는 ‘돈 선거’의 길을 닦아 주었다. 더구나 2010년 ‘시민연합’ 판결에서 기업과 단체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여 이해집단의 무제한 정치지원을 허용해준 대법원이니 이번에도 부유층의 기부 제한을 풀어줄 가능성이 높다.
중도보수로 보통 ‘스윙 보터’ 역할을 해온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이 선거자금 이슈에선 제한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확실한 보수여서 더욱 그렇다. 혹시, 대법원 판결의 지나친 파장을 원치 않는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편에 선다면 수백만 달러를 기부할 수 있는 “500명 미만의 최고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정부”로 운영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까. 대법원 심의에서 연방선관위 측 변호인 도널드 버릴리 법무차관이 경고한 위험이다.
“부패를 합법화시키려는 대법원” “정치가들 팝니다” - 거액의 기부는 보상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주고받는 ‘돈 정치’엔 부패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진보 미디어들의 전망도 자극적이다.
선거자금 뿐이겠는가. 어퍼머티브 액션은 상당수 주에서 주민 발의안으로 금지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벽은 부쩍 낮아져 지역정부 모임에서 기도는 일반화되고, 각종 낙태 제한법으로 여성의 선택권에 ‘과도한 부담’을 금지하는 연방법은 사문화 상태로 전락하고…에릭 시걸 교수의 예언처럼 이번 대법원 회기의 전쟁이 모두 끝나는 내년 6월말 경이면 미국인들은 많이 달라진 나라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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