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은 목사 <뉴햄프셔한인교회>
20년 후(2033년), 나는 칠순의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뒷산의 진달래 꽃잎이 막 내려않고, 춘향(春香)의 바통을 이어받은 목련꽃이 한창이던 1963년 4월 어느 날부터 70년 동안 나를 기다려 온 노인이란다. 어떤 노인인지 궁금해진다. 기다려진다.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지난 주말 우리 교우 중 한 분의 칠순연이 있었다. 가족 친지들과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들을 초대하여 칠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어머니 칠순연에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라는 주문을 받고, 몇 자 적어 내려가다 자판에서 손을 내려놓는다. 20년 후 내가 만나게 될 그 칠순의 노인이 자꾸만 내 마음의 걸음을 붙잡아 세운다. 기다란 턱에 양손을 개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마침 다음 주 신문 칼럼순서자 라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이런 글 어떨까 ? “내가 나에게 미리 쓰는 칠순사” 뭐 그런 글…! “아니, 이상해!”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하지만 20년 후 내가 만날 그 칠순의 노인은 환영하는 듯하다. 그래 써 보기로 했다. 20년 후 내가 기대하는 그 칠순 노인의 모습을 내가 “만들 수”(?) 있다고 믿기에! 앞으로 2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칠순을 맞으며, 그때는 어떤 모습일(이어야 할)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먼저 칠순을 축하하네! 안타깝게도 이 70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중간 중간 고개에서 (어떤 이는 40고개, 60고개도 넘지 못하고) 스러져 간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은데, 그대는 칠순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착각하지 말게. 자네의 칠순을 축하하는 이유는 일흔 살이 되면, 되어져 있을 자네의 모습 때문이라네. 내가 묻고 싶은 물음은 이것이네: 칠순의 나이라! 이제 많이 되어졌고, 되어져 가고 있는가? 그대는 오래 전부터 인생은 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되어져 가는 존재라 하지 않았는가.
맞네! 인간은 다 된 존재(being)가 아니라 되어져가는 (becoming) 존재라는 것, 그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네. 고대 히브리 사상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되어진 존재로 여겼지. 예수가 “나는 존재다” (I AM) 라고 선언했을 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네 (요8장). 오직 하나님만이 되어져감이 필요 없는 완전한 존재 (I AM WHO I AM, 출3:14) 라고 믿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역정 속에는 인간은 되어져가는 존재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담고 있다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갈4:19) 바울의 표현 역시 사람은 되어져가는 존재라는 말이 아닌가. 그 되어짐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말하지.
그대는 절대자의 우주 창조론 신봉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 정의가 어찌되었든 (아니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지도 모르지만) 창조된 그 인간의 “존재론적 진화”(ontological evolution)를 믿어왔었지. 그대 자신이 그 대상이기를 간절히 바랬었고. 다 된 존재가 아니라 나이듬과 함께 되어져 가는 존재 말일세. 가끔 화가 나면 “되어먹지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뭐 그런 식으로 말하곤 하던데.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런 평가를 하던 간에) 뭔가 되어져야 할 모습에서 멀어져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이듬은 그 관계를 좁히는 일과 비례해야 한다고 보네. 나이듬은 곧 되어짐이란 말일세.
따라서 그대의 칠순은 “성형수술”의 마지막 단계이어야 하리라. 70은 완전수라고 하지 않나. 다른 사람의 얼굴 말고 그 분이 원하시는 그대 자신의 완숙한 모습이 보여져야 하리. 몇 년 전 TV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건강강좌를 했던 두 명의 의사가 대담에 초대되었다네. 의사로서 평생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사회자가 주문을 했지. 성형외과 의사가 소개한 환자 이야기가 감동으로 와 닿아 잊을 수가 없군.
자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돈을 들고 찾아와 안면 성형수술을 해 달라는 칠순이 넘은 노인이었다나. “아니 어르신,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제 사신다면 얼마나 사신다고 성형수술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그러지 마시고 그 돈으로 맛있는 것 사 잡수시고, 여행도 하시고 그러세요.” 라고 말씀 드렸단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 왈, “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러니까 성형수술을 해야겠다” 고 떼를 쓰시더래. “내가 젊어서 방탕하고 주먹질을 좀 하다가 얼굴이 이렇게 일그러지고 칼자국을 남겼는데, 내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의사 양반, 나를 수술해 주시오. 내가 이 모습으로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을 뵐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얼굴을 반듯하게 고쳐주시오” 라고 했다네.
그대는 이 땅에 보내신 그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그 분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어져서 (“성형되어”) 그분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은 나이듬, 곧 되어짐의 꿈을 이렇게 담는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자다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17:15). 시인의 인생 목표는 되어짐이다. 그래서 날마다 성형수술 한다. 이 땅의 삶을 다하고 죽음의 잠에서 깨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무엇으로 만족할 것인가? 다른 것 말고 (내 놓을 것도 많을 텐데) 주님 닮은 모습이란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잠이다. 하루하루의 잠은 그 죽음의 연습이다. 그 하루하루의 잠에서 깨어남을 성형수술로 묘사한다. 하루하루의 잠에서 깰 때에 오늘은 어제보다 더 새로워지고, 더 주님 닮은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일게다. 칠순의 고개를 넘어서는 그대, 이제 그분의 형상으로 많이 되어져 있어야 하리라! 그대의 나이듬은 되어짐과 입맞춤이어야 하리라!
인터넷에 “칠순의 노래” 라는 게 있더군.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마음도 몸도 왕성합니다. / 칠십에 우리들을 모시러 오면/지금은 안 간다고 전해주세요./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삽니다. / 팔십에 우리들을 모시러 오면/아직은 빠르다고 전해주세요. /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아무것도 불만 없이 살아갑니다. / 구십에 우리들을 모시러 오면/재촉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 백세에 우리들을 모시러 오면/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어때, 웃는 걸 보니, 그대의 마음(바램)이 아닌가? 칠순을 맞은 그대, 팔순을 향해가는 “칠순의 청춘” 이기를(Be “seventy youth,” going on eighty)! 한마디 만 더 하겠네 (늙으면 말이 많다고 하지 않던가). 그대가 80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되어지기 위해서” 라는 사실을 있지 말게! 팔순 너머는 . . .? 어이, 다음에 말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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