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락 목사 (보스톤 사랑의교회/ 뉴잉글랜드 교회협의회 총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허투루 보지 않고, 꽃과 풀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아내고 그 잎사귀와 꽃잎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읽어내는 시인의 마음이 곱고 풍요로워 보인다. 그냥 스치듯 건성으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는 풀꽃,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럽다. 시인은 그 아름다움을 분명 보았던 게다.
사람도 건성으로 보면, 겉모습이 고우냐 미우냐로 판단하게 되지만, 자세히 오래 보면 다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던가. 시인은 그 비밀을 분명 발견해 낸 것이리라. 풀잎 하나 꽃잎 하나에 담긴 상처들을 시인은 또 어찌 볼 수 있었을까. 천천히, 자세히, 오래 보면서 그 속에 담긴 갖가지 사연들을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는 통찰은 인생의 신비를 깊이 들여다 본 사람의 삶의 고백이 아닐까 싶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통해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는 시인들의 시적 감성이 참으로 부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는 요즘 시가 좋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늘과 구름을 보면 시가 생각나고, 꽃과 나무, 산과 바다를 보면 왠지 시 한 수 읊고 싶어진다. 그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에 대해 뭐라 표현해주고 싶어서일 게다. 자연이 내게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 같고, 나도 그 말 걸어옴에 무언가 대꾸하고 싶기 때문일 거다. 생명이 깃든 것은 더더욱 좋다. 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만이 아니라, 생명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좋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1층에 있어 문틈으로 작은 벌레나 곤충들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기겁하고 놀라면서 빨리 잡아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난 조심스레 종이에 올려놓고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내보내준다. 물론 생명이 담긴 남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만큼은 아직 용서가 되지 않아, 또 밖으로 내보내기도 실상 어렵기에, 아쉽지만 집안에서 조용히 장례를 치러주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 빼고는 그 어떤 벌레나 곤충도 그들의 생명을 존중해 주고 보존해 주려 한다.
갈수록 풀과 꽃, 나무와 새, 돌과 물이 좋다고 했더니, 교인 중에 한 분이 그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라고 한다. 40대의 목사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싶어 살짝 째려보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말도 맞는 것도 같아 눈에 준 힘을 살포시 풀어 놓았다. 언제부터인가, 가까이 당겨봐야 잘 보이던 작은 글씨가 이제는 조금 밀쳐놓고 보아야 잘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어떤 분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이 그렇게 늙었나 싶어 갑자기 삶의 회의와 절망이 찾아왔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그 때가 되면 과연 그럴까 미리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그런지, 다행히 난 그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게 아닌가 싶기는 하다.
나이가 들어가긴 하지만, 오히려 그 나이 듦으로 인해 자연이 좋고,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이 좋고, 시가 좋아진다는 것이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세상이 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이 더 절실해지고, 영적 감수성이 갈수록 더 풍성해지니 말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성서의 증언이 사실로 경험되니 좋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서 그들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어서 좋다. 감사, 찬양, 탄원 등의 다양한 형태의 시들로 하늘의 문을 두드렸던 시편 기자들의 기도가 나의 기도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오니 그 또한 좋다.
나는 문학에 문외한 일 뿐만 아니라, 중학생 때 교회 시화전에 제출한 어설픈 시 한 수 외에는 달리 시를 써 본 적도 없다. 최근에는 목회하는 교회에서 ‘사랑의교회 시편 119편’을 교인들과 나누어 쓰면서, 가장 난해한 자음 ‘ㄹ’로 시작하는 여덟 절의 운율시를 쓰느라 골머리를 앓았던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시가 사랑스럽고, 시가 읽고 싶고, 시를 쓰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예전에 ‘시’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가슴 아픈 내용이 있었지만, 주인공 할머니가 시가 좋아서 시를 배우러 다니며 시를 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마치 나를 닮은 듯 하여 빠져들 듯 보았던 기억이 난다.
지난여름 8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볼일 보러 가족과 함께 나갔다가 그만 거친 장맛비를 만나 때마침 눈앞에 있는 서점으로 몸을 피했다. 이리저리 책을 둘러보려던 발길이 시집을 모아둔 곳에 묶여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고, 결국 돌아올 때의 짐 무게도 생각지 않고,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시집만 여러 권 사오고 말았다.
목회 성공과 교회 성장을 피 토하듯 부르짖는 책들을 잔뜩 사와서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모자랄 판에, 오랜만의 고국방문 길에서 시집들만 안고 돌아오다니, 나도 목회에 성공(?)하긴 어지간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왜 이리 마음이 뿌듯하고 괜스레 기분 좋은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젠 아침 고요한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도 달라졌다. 시적인 형태로 된 성경인 시편이나 잠언을 전채로 읽고, 그 날의 본문 말씀을 주 요리로 묵상한 다음에, 사가지고 온 시집을 열어 시 몇 편을 후식으로 읽고 음미해 본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시가 되어 가슴으로 다가온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푸근하고 따스해진다. 이제 기도도 시적 표현과 감성으로 드리고 싶어진다. 심지어 설교도 시 낭송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요즘 우리는 참으로 많은 글들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주고 받는다. 말과 글은 수도 없이 넘쳐 나지만, 홍수가 나면 사방이 물이어도 정작 마실 물은 없는 것처럼, 가슴 깊이 다가오는 말들은 찾기 어렵다. 간략하고 함축적이지만, 삶의 신비를 통찰한 몇 마디의 시를 주고받는다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다. 난 기독교 영성가는 곧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허투루 보지 않고 시적 영감을 가지고 보게 되고, 한 사람을 보더라도 지나치듯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애쓰니 말이다.
이 가을, 청명한 하늘 아래, 바다를 바라보며 시 한 수 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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